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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랫목의 밥 공기 같은 온기

등록 2020-02-14 05:59수정 2020-02-14 09:56

당신의 외진 곳
장은진 지음/민음사·1만3000원

장은진(사진)의 소설집 <당신의 외진 곳>은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한 젊은이들의 흔들리는 삶을 주로 그린다. 지난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표제작 ‘외진 곳’의 자매가 대표적이다.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을까?”

소설 도입부에서 화자의 동생은 언니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가 말하는 ‘여기’란 소설 제목이기도 한 외진 곳의 셋방,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중심에서 먼 변두리” “어둡고 냄새나는 구석 자리”이고, 자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모종의 사기에 걸렸기 때문임이 곧 드러난다. 그러니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신세 한탄과 사기범을 향한 원망과 분노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매가 원래 살던 원룸의 절반 크기인 이 방은 ‘ㅁ’ 자 집을 개조해 만든 셋집의 아홉 개 방 가운데 하나. 화장실과 샤워실, 세탁실은 공용이다. 자매는 각각 어린이집 보육 교사 보조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일하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다. 얇은 창호지 문과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을 보며 “가진 게 없다고 협박을 받는 기분”을 느끼거나, “아직 젊어 만만하게 보고 실패와 좌절이 이토록 자주 찾아오는 걸까”라는 상념을 곱씹는 장면에서 자매가 놓인 곤궁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 말미에서 자매는 성탄절 이브임에도 그냥 집에 머문다. “중심가에 가기엔 너무 멀어서”라고는 하지만, 중심가로 갈 돈도 없고 그곳에서 어울릴 친구나 애인도 마땅치 않은 처지. 쓸쓸한 저녁을 각오했는데, 교회 사람들이 방문해 캐럴을 불러 준 덕에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같은 셋집의 아홉 개 방에 모두 불이 켜진 모습을 보며 자매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린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나무에 전구를 둥그렇게 휘감아 놓은,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비록 외지고 초라한 집과 방일지라도 나름의 온기와 전망이 없지는 않다는 뜻이겠다.

‘울어 본다’와 ‘이불’ ‘점거’ 같은 작품들 역시 가난하고 고독한 젊은이의 초상을 조금씩 변주해서 그려 보인다. “고독은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것 같다”는 ‘울어 본다’의 주인공 여자, “정해져 있는 듯 절망의 질량은 결코 줄지 않을” 거라 믿는 ‘이불’의 정리 해고 남자, 그리고 “참고, 견디고, 다스리고, 이기고, 기다리는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점거’의 여자 들에게도 “아랫목에 밥 한 공기”(‘이불’) 같은 온기와 희망은 허락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믿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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