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
엄은희·구기연·채현정·임안나·최영래·장정아·김희경·육수현·노고운·지은숙·정이나·홍문숙 지음/눌민·2만6000원
“밤이 오면 내 노트북은 낮보다 뜨거웠다.” (홍문숙)
미얀마, 베네수엘라, 베트남, 이란, 일본, 중국, 타이, 필리핀, 홍콩 등 세계를 누빈 여성 현장연구자 12명이 흘린 땀과 눈물, 열정과 공감의 기록이다. 인류학, 지리학, 지역학 전공자들이 쓴 <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는 현지조사를 다룬 기존 저서들과 크게 다르다. 지금까지 발간된 현지조사 책들에도 물론 “모험과 성장의 드라마”가 있었지만 “그 책들에는 ‘여성’의 목소리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현장연구를 한 김희경. 현지조사 당시 연구자의 방은 이런 모습이었다. 일러스트 김일영
주기적으로 현장을 찾아 국경을 넘는 여성 연구자들은 남성과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받았던 질문, “혼자 나와 있나요?” 같은 말은 안위를 우려하는 표현이지만 한편으론 위험으로 다가온다. 가부장은 참으로 못 말리게 세계적인 시스템이라, 기혼자면 ‘남편이 네 연구를 허락해주더냐’는 질문에 시달리고 미혼이면 줄기찬 구애나 청혼을 거절하려 골머리를 앓는다.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한 압박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신체적·성적 위협, 건강 문제, 불안한 치안과 외국인 신분에 따른 불안정성 등 각종 스트레스는 여성 현장연구자들이 맞닥뜨리는 각종 문제들의 ‘기본’이다. 학계의 성차별이나 유리천장 같은 ‘여성 학자’ 일반이 겪는 오랜 숙제도 풀어야 한다.
베트남을 연구한 육수현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위험하지만 이득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김일영
과제가 큰 만큼 성과도 값지다. 여성 현장연구자들은 기존 지식과 이론 틀을 흔들고 저항하는 지식생산자로서 ‘지적 전통의 선을 넘는 사람들’인 동시에 “지리적 선 넘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성 현장연구자들은 국경을 넘고, 인생의 허들을 넘고,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을 향한 편견을 부수며 인류를 비롯한 생명체와 환경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기존 지식의 선을 없애고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책의 1부는 연구자와 연구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타이 북부 국경 지역 치앙라이의 교역을 연구하며 상인들과 함께 국경을 넘나들었던 연구자(채현정)는 자신이 장사에 방해되지 않는지 눈치를 보는 한편, 그들 곁에서 집요하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갈등한다. 실패의 경험은 그러나 그의 몸과 뇌리에 축적돼 결국 훌륭한 자산으로 변모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필리핀 이주노동자 연구라는 흔치 않은 주제를 선택한 연구자(임안나)는 여성들과 주로 만나며 삶과 노동을 살핀다. 어느 날,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던 이민경찰이 그를 따라 아파트까지 오는 바람에 사람들의 원성을 사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수없이 위기를 넘어 연구를 무사히 마쳤다. 중국의 연안을 조사하며 다양한 출신과 외모의 중국인을 만난 연구자 최영래는 자신의 선입견을 깨는 경험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혔고 장정아는 홍콩을 ‘연구’하러 온, 그것도 광둥어를 잘 하는 한국인 여자가 거의 없었기에 어딜 가나 호감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식적인 질문과 답변 듣기를 그치고 ‘현장’ 사람들의 애착과 슬픔을 최대한 포착할 수 있는 쪽으로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서 그의 연구는 깊어졌다. 사람의 ‘진심’은 아무도 쉽게 알 수 없다는 깨달음 덕분이었다.
‘홍콩의 현장’에서 질문을 바꾸어간 연구자 장정아. 중국반환기념일에 열린 민간단체 행진에서 재야단체연합의 부탁으로 모금함을 들었다. (2010년) 일러스트 김일영
2부에서는 연구자의 관계 맺기를 주로 다룬다. 이란의 젊은 세대를 연구하며 구기연은 현지에서 겪은 아찔한 순간과 연구자의 심적 갈등을 충실히 기록했다. 여성인 그에게 히잡에 대한 문화적 규범을 따르는 일은 자신을 연구 도구로서 내놓는 경험이기도 했다. 일본 농촌 지역에 정착하여 젊은 여성 한국인으로서 오해와 이해를 동시에 받았던 김희경은 ‘라포’(친밀함과 신뢰적 관계) 형성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 나게 들려준다. 베트남 현지인과 관계 형성을 위해 “영혼 한 톨까지 끌어모아” 진심으로 상대를 대했다는 연구자(육수현)의 경험도 찡하게 다가온다. “로맨틱 코미디의 문화인류학 버전”처럼 평범하지만 매력 넘치는 연구자가 현장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결국 인정받고 사랑받는 연구자로 거듭나리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는 연구자 노고운은 현지의 복잡한 사정 탓에 어려움과 불운을 겪었지만 “하지 않은 현지조사는 있어도 실패한 현지조사는 없다”고 깨닫는다.
이란 사회의 정동을 연구한 구기연. 히잡을 쓰고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3부에서는 지은숙, 엄은희, 정이나, 홍문숙의 글이 이어진다. 지은숙은 일본에서 한류 팬을 비롯한 중년 비혼자들을 연구했다. 그는 서구와 달리 동아시아의 경우, 혼인율의 저하가 동거와 사실혼, 혼외출산율의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중년 비혼자 다수가 친밀한 파트너도 자식도 없이 1인 가구로 살거나 고령인 부모와 산다는 역설적 결과를 발견했다. 고령 부모를 돌보는 여성 자녀들의 애정, 책임감, 자아 성실성을 발견한 연구자는 “내가 발견했다기보다 그들에게 배우고 설득당했다”고 썼다. 필리핀 현지의 개발 현장에서 함께 싸우고 기록한 여성지리학자 엄은희는 여성이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피로나 감정노동 속에서도 현지에서 만난 “그들”이 어느새 자신 안에 들어와 “나‘들’”이 된 과정을 설명한다. ‘21세기 사회주의’가 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주변 빈민가인 바리오 주민들의 희망이 되었는지 살핀 연구자 정이나는 성별 고정관념이 뒤집힌 현장을 소개한다. 주민평의회의 든든한 여성들과 ‘순종적인’ 남성들을 만나며 여성들의 지도력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홍문숙은 국제개발 전문가인 연구자에게 도움을 얻으려 최대한의 호의를 베푸는 미얀마 아동보호단체 대표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과정을 촘촘한 대화체로 재현해 둘 사이 긴장감과 현장의 맥락을 생생하게 전했다.
성별 위계가 뚜렷한 사회에서 여성 연구자들이 겪은 불리한 경험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현지 여성들과 간극을 줄이기도 했다. 연구에서 지켜야 할 윤리적 책임은 분명하지만 여성 연구자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쓸 수 있는 매뉴얼이나 보호장치가 없는 현실을 볼 때, 이들의 증언과 기록은 더더욱 중요해 보인다. 지은이들은 나아가 이 책이 ‘인생의 허들 통과하는 법’이나 ‘연구의 비법’으로 전수되어 후배 연구자들에게 응원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딱딱한 논문을 주로 쓰는 학자들이라곤 믿기지 않게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풀어낸 솜씨가 훌륭해 대중 교양서로도 손색없을 뿐더러, 10~20대 여성들에게도 인생의 참고서로 읽힐 만한 책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일러스트 김일영·눌민 제공
타이 북부 국경교역 동행 관찰기를 쓴 채현정. 일러스트 김일영
이스라엘 도시 슬럼의 필리핀 이주노동자를 연구한 임안나. 일러스트 김일영
중국 바다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적 연안’을 다룬 최영래. 일러스트 김일영
중국 옌볜에서 현지조사한 노고운. 겨울에 바람이 불면 석탄 가루가 날아다녀 집에 오면 옷이나 얼굴에 붙은 가루를 떼어냈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본 여성을 연구한 지은숙. ‘주부’로 대표되는 일본 여성의 전형적 논의에서 벗어나려 고군분투했다. 일러스트 김일영
필리핀에서 현지조사를 한 엄은희. 개발 현장에서 함께 싸우고 기록했다. 일러스트 김일영
베네수엘라 21세기 사회주의가 등장한 까닭을 연구한 정이나. 일러스트 김일영
전환기 미얀마의 교육과 개발협력을 연구한 홍문숙. 일러스트 김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