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지음/궁리·1만7000원 일상은 어지럽고 빽빽하다. 갖가지 소리가 정신을 흩뜨려놓고 너무 많은 구호들이 훈계한다. 이런 와중에 나에게 귀 기울이고 남과 공명하는 일은 사치라 여겨지기도 한다. 서울 경복궁 옆 길담서원은 기꺼이 이 ‘사치’를 누리고자 하는 이들의 공간이다. 대입, 취업 등 한 단어로 목적을 규정할 수 있는 여타 많은 공간과 달리 길담서원은 정밀한 기획이 없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 자가 잠시 들러 쉬어가라’는 설립 취지가 뼈대로 있긴 하지만, 나머지 여백은 방문객들의 목마름에 따라 독서모임, 음악회, 원서강독모임 등으로 다채롭게 꾸려진다. 길담서원의 학예실장인 작가는 2008년부터 시민들과 함께 채워나간 길담서원의 이력을 기록했다. 다만 조선시대가 아닌 2000년대에 세워진 서원인 만큼 공부의 성격과 방향도 전통 서원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을 도맡아 해주는 하인이 있어 맘 편히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2000년대의 서원은 그럴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사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고, 수지타산의 문제 앞에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는 법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작가는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두고 번뇌에 빠졌던 경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니 2000년대 서원을 운영하는 이들을 ‘선비’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고매한 영혼만을 운운하는 ‘선비’보단 직접 땀 흘리며 감각하는 ‘시인’이 매력적인 법. 길담서원의 시인들은 책 밖 세계의 고통을 마주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법을 탐구하는 등 선비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기도 한다. 어지럽고 빽빽한 일상 밖 도피처가 아닌, 일상을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우물의 이야기를 담은 책.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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