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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재난 이후를 사는 방법

등록 2020-02-28 05:59수정 2020-02-28 10:32

부림지구 벙커X
강영숙 지음/창비·1만5000원

강영숙의 소설 <부림지구 벙커X>는 지진이 휩쓸고 간 도시의 지하 벙커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규모 제철단지와 그에 딸린 거주지로 이루어진 부림지구는 제철 산업의 몰락으로 쇠락한 상태에서 대규모 지진을 만났다. 정부는 지진이 발생한 부림지구를 오염 지역으로 판단하고 봉쇄한 채 최소한의 식량만 공급한다. 소설은 40대 독신 여성 유진을 비롯해 벙커X(엑스)에서 함께 생활하는 열 명 남짓한 이들을 통해 재난 이후의 삶을 그린다.

“우리는 지진 피해 지역에 사는, 오염된 지역에 사는, 오염된 물과 오염된 흙처럼 오염된 사람들이었다.”

식량이 부족하고 물과 전기 공급도 원활하지 않은 벙커의 삶은 불편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유진을 비롯한 이들은 ‘대장’의 지휘 아래 나름 질서 잡힌 일상을 이어 간다. 생존자와 식량을 찾아 폐허가 된 도시를 수색하고, 비록 벙커 안에서일망정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과는 달라질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이들이 벙커를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벙커 거주민들에게 이웃 도시로 이주할 것을 권유하지만, 이주하기 위해서는 몸에 생체인식 칩을 주입하고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벙커에서 함께 생활하던 이들이 하나둘 벙커를 떠나거나 죽음을 맞는 가운데에서도 유진은 끝까지 벙커를 고수한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기 있는, 부림지구의 오염된 흙을 다 가져와요. 내가 먹을게요. 오염된 물도 우리가 다 마실게요. 그러니 여기서 다 나가세요. 여기에 우리만 남겨두세요. 여기서 살게 가만 놔두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우리는 칩을 넣지 않을 겁니다.”

강영숙 작가. ⓒ신나라
강영숙 작가. ⓒ신나라

<부림지구 벙커X>는 지진이라는 대 재난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재난으로 귀결되는 사회적 불안과 균열의 조짐 역시 예민하게 포착한다. 지진이 나기 전 폐기물 운반 트럭을 모는 일을 했던 대장의 말을 들어 보자.

“제 트럭에는 원전지대에서 쓰던 방사능에 노출된 기계장치들이 잔뜩 실려 있었는데, 흙으로 덮어 숨기고 천으로 단단히 동여맨 상태였죠. (…) 내 처지가 그 트럭에 담긴 폐기물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진 다발 지역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던 2014년부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강영숙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뜻밖에 일어난 재난은 어떤 계급이나 격차를 한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재난과의 동거는 늘 더 어려운 쪽의 몫이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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