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숙 지음/창비·1만5000원 강영숙의 소설 <부림지구 벙커X>는 지진이 휩쓸고 간 도시의 지하 벙커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규모 제철단지와 그에 딸린 거주지로 이루어진 부림지구는 제철 산업의 몰락으로 쇠락한 상태에서 대규모 지진을 만났다. 정부는 지진이 발생한 부림지구를 오염 지역으로 판단하고 봉쇄한 채 최소한의 식량만 공급한다. 소설은 40대 독신 여성 유진을 비롯해 벙커X(엑스)에서 함께 생활하는 열 명 남짓한 이들을 통해 재난 이후의 삶을 그린다. “우리는 지진 피해 지역에 사는, 오염된 지역에 사는, 오염된 물과 오염된 흙처럼 오염된 사람들이었다.” 식량이 부족하고 물과 전기 공급도 원활하지 않은 벙커의 삶은 불편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유진을 비롯한 이들은 ‘대장’의 지휘 아래 나름 질서 잡힌 일상을 이어 간다. 생존자와 식량을 찾아 폐허가 된 도시를 수색하고, 비록 벙커 안에서일망정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과는 달라질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이들이 벙커를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벙커 거주민들에게 이웃 도시로 이주할 것을 권유하지만, 이주하기 위해서는 몸에 생체인식 칩을 주입하고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벙커에서 함께 생활하던 이들이 하나둘 벙커를 떠나거나 죽음을 맞는 가운데에서도 유진은 끝까지 벙커를 고수한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기 있는, 부림지구의 오염된 흙을 다 가져와요. 내가 먹을게요. 오염된 물도 우리가 다 마실게요. 그러니 여기서 다 나가세요. 여기에 우리만 남겨두세요. 여기서 살게 가만 놔두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우리는 칩을 넣지 않을 겁니다.”

강영숙 작가. ⓒ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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