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한겨레출판·1만5000원
왜 우리는 ‘나눔’엔 후하고 ‘분배’엔 박할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애쓰거나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한 이들은 갈채를 받으며 ‘성인’(聖人)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자고 말한다면? 사적 온정으로는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공적 분배’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성인’이 ‘빨갱이’로 둔갑하는 건 한순간일 테다. 상위 20%의 사람들은 부의 8할을 차지하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2할을 두고 다투는 ‘20 대 80’의 사회에서, 분배는 편중된 부를 ‘80’에 속하는 이들에게도 공유하는 일이다. 그러나 분배를 반겨야 할, 현실 속 다수의 80은 되레 분배를 두려워한다. 분배는 능력에 따른 보상 원칙을 위배해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고 성장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홍세화의 신작 <결: 거칢에 대하여>는 이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지적한다. 왜 80은 20의 자리에서 슬퍼하며 즐거워하는가. 그렇다면 20은 어찌하여 80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분노하지 않으며, 존재를 배반하는 일은 왜 80에게서만 일어나는가. 책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끝없이 회의하고 성찰한 홍세화의 사유들이 담겼다.
그는 ‘자유’를 핵심 화두로 던진다. 자유가 부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존재와 의식 사이의 함정들”에 빠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에게 있어 옳고 그름의 근거를 스스로 고민할 줄 알며, 내 삶의 결정을 외부의 그 어떤 힘이 아닌 오로지 나로부터 비롯하여 내리는 이들은 자유롭다. 자유로운 이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존중받기 위해 타인의 자유도 함께 존중하며, 나를 포함한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게끔 각자의 환경·조건을 넘어서 서로 연대를 이룬다.
11년 만에 단독 저서를 펴낸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이 되자고 말한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하지만 신자유주의 구조 속에서 자유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수반한다. 학교와 군대는 권력에 맞서 반기를 드는 자를 벌하고 배제하며, 사회는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관념을 끊임없이 주입하면서 이를 체화하지 않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제도화된 권력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사고를 획일화하고자 하는데, 더불어 자본의 양극화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고 미래는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이에 불안이 버거워진 사람들은 점차 자유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대신 “객관적 진리로 포장된 지배 세력의 관점 또는 지배 세력의 이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결국 ‘생각하는’ 자아는 사라진다. 대신 지배세력으로부터 주입된 ‘생각’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된다고, 작가는 꼬집는다. 그 ‘생각’이 내 존재를 배반하는 것일지라도 회의하고 성찰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것을 진리로 여기며 무작정 고집한다는 것. 미지에 점령된 일상 속에서 환대와 배려는 약자의 사치로 치부되고 사람들 사이 연대의식은 흐려진다. 가진 자의 고충에 대해선 깊이 공감하면서 ‘편한 노예’의 지위를 얻기 위해선 자비 없이 서로를 헐뜯는 역설.
작가가 지적하듯 이런 역설은 한국 사회에 이미 팽배하다. 가령 불의를 견디다 못해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에겐 각종 ‘대란’의 딱지가 붙는다. 급식 대란, 교통 대란, 물류 대란…. 노동자들에게 소요의 책임을 지라고 성토하는 모습은 기괴하고 암울하다. 이방인을 대하는 데 있어선 어떤가. 상해로 망명한 난민들의 임시정부에 뿌리를 두고 매해 이를 자랑스럽게 기념하지만, 동시에 난민·이주민 등이 들어왔을 땐 조선인을 다뤘던 일본의 모습을 충실히 답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업은 가장 대표적인 공감 대상 중 하나다. 타국의 경제 보복 조처에 자국 기업이 받는 불이익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으로 대서특필되지만, 기업이 하청을 통해 위험과 죽음마저 외주화하는 일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사안이 다를 뿐, 사람들의 공감과 연대의식은 동일한 방향으로 이뤄진다. 80에서 20으로, 20 가운데서도 극소수의 1을 향해서 말이다.
작가는 “한국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80은 20과 한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80에 속하든 20에 속하든 모두 한표씩 투표권을 행사하는 ‘평등한 사회’에서도 격차와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고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작가가 인용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 속 문구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편하게 살려면 굴종하라!’ 이것은 더 이상 지배 세력의 명령어에 머물지 않으며, 개개인의 좌우명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조용히 종말을 기다리거나 화전민이 되어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려야 하는가? 다행히 작가는 ‘이대로면’이라는 전제를 붙인다. “(이대로면) 바뀌지 않을 것”이란 말은, ‘이대로’의 전제를 타파하자는 작가의 간절한 호소이기도 하다. 현재 상황을 만든 첫 도미노는 ‘자유의 부재’였다. 생각하고 회의할 자유를 빼앗긴 자리에 권력의 담론이 무방비로 들어오니 순순히 내 존재를 배반하고 복종하게 됐다. 그러니 작가는 안간힘을 써서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이 되자고 말한다. 불안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지만 미지는 가능성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은 ‘확실성’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능성’의 잠재력을 믿은 이들의 피와 땀에 의해 세워졌음을 기억하자고, 작가는 강조한다. 신념 밖으로 계속해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한뼘의 희망을 지키고자 분투했던 작가의 생애 결이 겹쳐 보인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 홍세화의 11년 만의 신작.
박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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