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등한 화합-동아시아 문명의 심층>(지식산업사).
국문학 권위자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낸 책이다. 그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의 화합을 위한 방도로 ‘대등론’을 제시했다. ‘대등론은 동아시아 문명 심층의 유산이다. 대등론을 찾아 발전시킬 때 동아시아가 화합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이 분명해진다.’
국가들 사이에 우열이 있다는 차등론의 대안이 왜 평등이 아니라 대등일까. 저자의 답은 이렇다. ‘평등론은 유럽 문명권이 선도해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공허한 이상에 머물 수 있다. 평등의 근거를 절대자의 사랑에서 찾는 형이상학도 (동아시아인들에게) 낯설다.’
그는 책에서 대등론을 채울 수 있는 동아시아의 여러 인물과 텍스트를 제시했다. 원나라 재상이자 시인인 야율초재(1190~1244)도 그중 하나다. ‘요나라 왕족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부름을 받아 난폭한 야만인(몽골 정복자)을 슬기로운 통치자로 변모시켰다. 약탈보다 생산, 징벌보다 관용, 전쟁보다 평화를 소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인 가운데 소수민족인 거란계 야율초재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단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아서다. 조 교수가 십여 년 전 베이징외국어대에서 자신의 책 <한국문학통사>를 교재로 강의할 때 수강한 12명에게 물어봤으나 한 명도 알지 못했단다. “청나라는 베이징에 북방민족 출신 야율초재를 기리는 사당도 만들었어요. 소수민족을 우대한다는 중국이 정작 학교에서 위대한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야율초재를 가르치지 않고 있어요.” 8일 전화로 만난 조 교수 말이다.
당나라 침공을 물리치고 주권을 유지하다 원나라 때 중국의 일부가 된 남조국(649~902)이 세운 덕화비도 대등론을 말할 수 있는 예라고 조 교수는 썼다. ‘덕화비는 국가 위업을 보여주는 금석문의 완성판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전체의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 덕화비에 나오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통치 원리가 우주의 질서와 부합해 백성은 물론 동물이나 식물에도 혜택이 미친다”는 문구는 바로 동아시아 문명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순신 이야기도 대등론 관점에서 새로 해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의 러시아 침략을 배경으로 한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프랑스인들의 마음까지 울린 것처럼 임진왜란도 애국주의 고취만이 아니라 전쟁이 인류가 저지르는 최악의 과오임을 설득력 있게 그리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창작 소재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가 주목한 이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에 항복한 뒤 귀화한 왜군 여여문이다. 투항한 뒤 왜군 정탐 활동을 한 여여문은 어느 날 왜군 넷의 목을 베고 돌아오다 명군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왜군 수급을 빼앗아 공을 가로채려는 아군의 탐욕에 희생된 것이다. “여여문을 다룬 영화라면 일본인도 감동할 겁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일본 병사들도 개죽음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죠. 이순신은 영웅이라고 추앙하고 다른 모두는 깎아내리는 유치한 짓은 이제 그만 해야죠.”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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