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산 소설 ‘남자는 놀라거나…’
소설가인 중년남성 대학교수 이야기
‘제국의 ○○○’ 둘러싼 사건과 병치
“그러다 ‘한남충’ 돼요” 경고 듣고
여성 제자의 독려와 질책 덕분에
페미니즘에 눈 뜨고 변화 모습 보여
소설가인 중년남성 대학교수 이야기
‘제국의 ○○○’ 둘러싼 사건과 병치
“그러다 ‘한남충’ 돼요” 경고 듣고
여성 제자의 독려와 질책 덕분에
페미니즘에 눈 뜨고 변화 모습 보여

중년 남성 지식인의 페미니즘 수업기를 소설로 쓴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의 작가 박금산. “이 책을 내기 전의 나와 이 책을 낸 후의 나는 다를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금산 제공

박금산 지음/도서출판b·1만4000원 박금산의 소설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는 중년 지식인 남성의 페미니즘 입문기다. 책은 소설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박 교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페미니즘이라는 ‘낯선’ 영토에 발을 들이고 그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병치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도발적으로 다루어 법정 다툼까지 초래한 책 <제국의 ○○○>를 둘러싼 사건이 하나이고, 박 교수가 졸업한 여자 제자 ‘혜린’을 통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자신의 무지와 잘못을 깨닫는 상황이 그 둘이다. 두 이야기는 긴밀하게 깍지를 끼고 박 교수를 페미니즘의 언어와 사고, 실천의 신세계로 이끈다. 페이스북 ‘좋아요’가 빅뱅 구실을 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새 소식을 훑어 보던 박 교수는 어떤 저자가 책 때문에 형사 고소를 당했다가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글을 읽고 축하의 뜻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뒤이어 관련 기사를 읽던 박 교수는 사태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판단에 도서관에서 문제의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한다. “그는 ‘좋아요’를 누른 것을 후회했다. (…) 곳곳에서 그는 난관에 봉착했다.” 책의 논지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쾌감과 메스꺼움, 분노로 잠을 설친 그는 누군가와 그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혜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이튿날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자신의 독후감에 동조해 주리라 기대했던 혜린은 오히려 까칠하기만 하고, 급기야 헤어진 뒤에는 “교수님, 진짜, 리얼한 한국 남자예요. 그러다 ‘한남충’ 돼요”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다.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단과대학 성평등센터 관계자인 동료 교수가 자신에게 들어온 제보라며 보여준 페이스북 글에서 혜린은 자신과 만났던 일을 두고 “권력자” “폭력” “성적으로 대상화된 경험” 운운하며 “한 번만 더 그러면 고소할 것”이라고 밝혀 놓지 않았겠는가. “펑!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남자 교수가 졸업한 여자 제자에게 야밤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비록 책에 나온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강간”이니 “매춘”이니 하는 용어를 입에 올린 것부터가 문제였다. 게다가 교수가 취직자리라도 소개해줄 줄 알고 나갔던 자리에서 엉뚱하게 책에 관한 이야기만, 그것도 “성담론을 지식상품으로 소비하는 남성의 우월의식에 빠져” 늘어놓는 바람에 혜린의 분노가 폭발한 것. 혜린의 폭발은 박 교수의 페미니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과도 같았다. 박 교수는 그 뒤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고자 <제국의 ○○○>와 관련 서적을 꼼꼼히 읽고 강연장과 재판정 등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한편, 혜린을 선생님 삼아 자신의 무지와 오류를 확인하고 바로잡고자 한다. ‘혜린아, 고맙다. 너를 통해 언어 하나를 배웠다’라는 독백이 그 과정에서 나오거니와, 이 독백 이후에도 박 교수를 향한 혜린의 질책과 독려는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고 날카로워진다. <제국의 ○○○>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 속 상황과 포개지는데다, 소설가 겸 대학 교수라는 주인공의 처지가 작가 자신(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을 강력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에 독자는 이 소설을 허구가 아니라 일종의 수기처럼 읽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한겨레>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몇해 전 자신이 한 소설창작 강의 경험이 이 소설 집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2017년 봄학기에 ‘페미니즘으로 소설 쓰기’ 강좌를 진행했어요. 페미니즘은 트렌드가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소설가라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했지요. 전반부에 페미니즘 관련 조별 발표를 하고 후반부에 창작소설을 합평했죠. 그런데 제가 페미니즘을 너무 모른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수업에 날카로운 수강생들이 많았습니다. 학생들과 대화에서 저도 많이 배웠어요. 그런데 학기가 끝나고 강의 평가 설문을 읽었는데, 장난이 아니더군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교수야, 공부해라.’ ‘당신은 가르치러 오는 게 아니라 배우러 옵니까?’ ‘가부장제 말고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뭐 있습니까?’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학생들의 이런 반응이 소설 속 혜린의 캐릭터에 응집된 셈이다. “척하지 마세요! 머리로만 사색하지 마시고, 노력하세요” “교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저에게 얼룩이고, 트리거이고, 변화시키고 싶은 대상이에요”라는 혜린의 신랄한 공격에 박 교수는 휘청거린다. “도대체 모르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갑자기 눈물이 나려 했다.” 작가는 “혜린이한테 마음 놓고 교수를 까대는 자유를 줬다”며 “혜린이는 처음에는 더 강렬했지만 출판을 앞두고 ‘보편적인’ 성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덜 날카로워졌다”고 말했다. 혜린의 지도를 받으며 박 교수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수없이 많은 ‘가해’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 자신의 삶이었다. 남자로 태어나 사는 삶 자체가 그것이었다. (…) 교수에게는 ‘위안’이 하나의 빼앗긴 단어였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모든 언어가 ‘위안’인 격이었다. 역사 전체가 빼앗긴 언어의 세계였다. 모든 경험이 억압당한 경험이었다.” <제국의 ○○○>와 박 교수의 페미니즘 수업이 이렇게 만난다. 소설 제목은 “2020년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 앞에 선 남성의 포지션”을 가리킨다고 작가는 말했다. “여성운동을 통해서 서사물 속 여성 인물들은 놀라워하고 무서워하는 존재에서 행동하는 존재로 달라지죠. 지금 한국의 남성들을, 달라지기 직전의 단계로서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단계로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되어보기’ ‘공감하기’ ‘물어보기’,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쓰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어요. 이제 알았으니 실천해야죠.”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중년 남성 지식인의 페미니즘 수업기를 소설로 쓴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의 작가 박금산. 박금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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