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사냥, 도살, 도축 이후 문자 발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
헤르만 파르칭거 지음, 나유신 옮김/글항아리·5만4000원
“처음에 있었던 것은 ‘말’이었다.”
그땐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 ‘소리’ 정도의 의사표현이었을 것이다. 발간 전부터 역사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은 책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원제: 프로메테우스의 아이들)는 서문부터 “문자 이전의 인간의 세계”를 다룬다고 못 박는다. ‘선사’라 일컫는 원시시대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몰이해와 편협한 역사인식을 타파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한 책이다.
국제적인 고고학자이자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헤르만 파르칭거(61)가 2014년 독일에서 발간한 이 책은 7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출현 이후 도시와 문자 발명까지 세계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장구하게 펼쳐 낸다. 굽이굽이 비단 펴듯 각 대륙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이라는 인류사의 무늬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대 디엔에이(DNA) 분석 연구 결과까지 아우르며 세계 고고학의 최신 성과를 보여준다. 한국어판은 장장 1128쪽에 걸친 모습으로 대작의 아우라를 유감없이 뽐낸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상. 도나우강 하류 지방. 글항아리 제공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
아프리카에만 퍼져 있던 700만년 전 채식주의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거쳐 인류의 조상은 점점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게 된다. 270만년 전, 최초의 석기를 제작한 이들은 호모 루돌펜시스와 호모 하빌리스로 거론된다. 그들의 자갈 석기는 커다란 고기를 한 입 거리로 떼어내기 위해 인간이 벌인 목표지향적 사고와 행동의 증거였고 인류사의 첫 혁신이었다. 이후 200만년 전에서 30만년 전 사이를 스쳐 간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에르가스터는 수렵생활에 몰입한다. 고인류는 신선한 고기를 더 많이 먹으며 두뇌가 좋아졌고 무기를 개발하여 근육을 키우고 사냥 전략을 수립한 뒤 멀리 이동해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원제 ‘프로메테우스의 아이들’이 가리키듯 불은 인류 발전의 기초였다. 호모 에렉투스가 처음 사용한 불은 따뜻함과 맛있는 음식 이상의 것을 주었다. 불은 사회적 중심을 이루어 그 속에서 언어가 형성되었고 사회적 연대와 제도와 제례 또한 만들어졌다. 이렇게 270만년 전부터 구석기시대 말엽인 약 30만년 전까지 최초의 석기 시대는 인류 역사의 90%를 차지한다. 인류의 근본적 변화가 이 시간의 마지막 시기 모두 일어났다는 것이다.
30만~40만년 전에서 4만년 전 사이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또한 불을 사용했고 이동생활을 하고 털가죽 옷을 입었다. 그들의 가장 큰 기여는 저승세계를 발견하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대응했다는 점이다. 그 뒤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는 투창가속기라는, 사냥 성공률을 높이는 획기적인 기계와 바늘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생식률의 관점에서도 훨씬 우월했다. 기원전 4만년에서 기원전 1만3000년 사이 현생인류는 마침내 전 세계에 퍼져 살게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섬세한 비너스의 조각 등 최초로 세계적인 예술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악기를 만들어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해부학적 관점뿐 아니라 문화적 관점에서도 현생인류라 부르는 것이 정당한 까닭이다.
발렌도르프의 비너스, 오스트리아. 글항아리 제공
‘신석기 종합세트’는 점진적으로 출현했다
지은이는 고고학의 권위자답게 기존 학설을 반박하는 데 망설이지 않고 새로운 이론을 적극 받아들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예컨대 지중해 지역의 신석기화가 이뤄진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대의 띠무늬 토기 문화는 중석기인이 스스로 발전해 이룩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유골 디엔에이를 조사한 연구 결과 유럽 동남부 신석기 이주민이 건너간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듯 디엔에이 연구의 경우는 앞으로 고고학의 중심에 설 것이 분명하지만 지은이는 이런 연구 방법이 시작 단계이며 폭넓은 데이터베이스가 결여돼 있다는 것, 연구의 신빙성을 전문 인력만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을 들어 여러 차례 주의를 준다. 마르크스주의적 고고학자 비어 고든 차일드의 ‘신석기 혁명’ ‘도시혁명’론 역시 반박한다. 수렵 채집에서 농경사회로, 자급자족적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사회 문화로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차일드의 주장을 의식한 듯 책 전반에서 거듭 “‘신석기 혁명’이란 개념을 매우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개념을 일직선적인 발전으로 읽는 것을 우려한 대가의 경고이기도 하거니와 “신석기 종합 세트(정착생활, 농경, 가축 사육, 토기 생산)”의 각 요소는 장기간 “점진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신석기의 모든 문화적 요소가 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초로 곡물을 재배하고 잉여생산물을 집단 공동으로 취급한 시점에서 1000년이나 지나서야 야생동물이 처음 가축화하고, 원시적 토기가 제작되었다. 공동체 결속과 정착생활을 상징하는 숭배 의식과 제의는 신석기 생활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있었다. 농경과 가축 사육은 수만 년 간 벌인 자연과의 치열한 씨름과 상호작용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차일드에게 이데올로기가 있고 데이터가 없었다면, 파르칭거는 데이터가 풍부하되 이념은 없는 고고학자라 일컫기도 한다. 그가 철저한 증거에 입각한 치밀하고 현대적인 고고학자라는 뜻도 될 것이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세계
지은이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남태평양,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세계 곳곳의 유적을 검토하면서 기후와 환경에 맞서 일으킨 사건들의 시간적 연결성과 인과적 연관성을 하나하나 따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찍이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강조한 바, 모든 것은 고립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로 연결된 세계’라는 관점을 잃지 않는 것이다. 가령 어떤 곳에서는 신석기 문화요소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채 통째로 ‘수입’되기도 했다.
책 중반을 넘어서며 이어지는 각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을 중심으로 한 서술은 기가 질리도록 상세하다. 이렇게나 고고학적 유산들을 챙겨가고 있지만, 가야 할 길은 멀다. 기원전 6000년대 이후 갠지스강 평야의 벼 농부와 토기 생산자, 기원전 8000년대 양쯔강의 벼 농부와 토기 생산자는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도나우강 하류와 트라키아에선 작은 점토 조각들을 일부러 깨뜨려 집에 보관했는데 그 이유도 아직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세계 곳곳의 식물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 조건이 달랐지만 세계 모든 지역이 고유의 리듬으로 연결되어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결국 고군분투하며 수렵의 작전을 짜고 식량을 생산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인간, 서로 소통하다 안 되면 싸우고 죽여가면서도 마을과 도시를 만들어나간 인간, 성별에 따라 매장방식을 다르게 하고 부장품을 이리저리 넣어보는 등 사후세계를 점치면서 서로에 대한 숭배와 믿음과 헌신의 시간을 보내온 인간의 시간에 대한 헌사다. 인류 역사의 법칙성이 있다면 그건 “자연이 만든 한계를 넘어가려는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욕구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한반도의 거석문화 등을 포함해 1000쪽이 넘도록 책 읽기의 수고로움을 마친 독자가 마주칠 진실은 “모든 문명은 붕괴를 특징으로 삼는다” “예외 없이 모두 사라진다”는 허탈하지만 차가운 진실이다. “모든 인간 문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결국 소멸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의 조건이다.” 이 사실을 알기 전에도, 알고 난 뒤에도,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오늘도 끝없이 말을 주고받고, 따뜻한 불 주변에 모이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예술활동을 하고, 의례를 하고, 고인을 기념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 또한 인간의 조건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장식된 상아 손잡이에 규석 칼날이 장착된 제사용 칼. 나카다, 이집트. 글항아리 제공
해골을 석고 뜬 모습, 예리코(텔 에스 술탄). 기원전 8600년부터 최대 기원전 6200년까지 당시 예리코에서는 특별한 제의와 해골 숭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항아리 제공
기원후 300년경 형성기 말엽 메소포타미아 초기 고등 문명에 존재했던 석두상, 멕시코. 글항아리 제공
북중국 뉴허량에서 출토된 숭배 제의를 위한 구조물 평면도와 점토로 만든 안면상. 글항아리 제공
풍만한 신체의 소형 여성 조각상, 하즐라르, 터키. 글항아리 제공
하르툼 신석기 무덤에서 출토된 소형 조각상, 수단 북부. 글항아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