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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 서로 애틋한 건 길들여지기 때문이야

등록 2020-04-03 06:01수정 2020-04-03 11:14

고작이란 말을 붙이기엔 너무나 애틋한 사물들
정영민 지음/남해의봄날∙1만4000원

우리는 모두 만지작거리며 처음 세상을 만났다. 젖병을 쥐고 걸음을 내디뎠을 때부터 처음 젓가락질을 배우고 글씨를 꾹꾹 눌러 쓰기 시작하던 순간까지 우리는 손으로, 온몸으로 만지며 사물을 배웠다. 지금도 그렇다. 새 구두를 사도 발에 익숙해질 때까지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기다려야 하며, 서툴렀던 작업도 연습을 거듭하면 어느새 손에 익곤 한다.

<애틋한 사물들>의 저자 정영민은 아령, 식판, 손톱깎이 등의 사물을 통해 그가 자라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물과의 관계는 성장통’이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물과 마주쳐 사용법을 익혀나가는데, 처음엔 사물과 손 사이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사물도 사람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고, 사람도 사물을 능숙히 다룰 만한 감각과 근육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물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그렇게 사람과 사물 사이 갈등과 화해가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그제야 둘은 단단히 묶이게 된다.

정영민 작가. 남해의봄날 제공
정영민 작가. 남해의봄날 제공

뇌병변장애인인 저자는 사물을 만날 때 조금 다른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섬세히 손을 움직이기 불편한 그에게 단추는 오랜 기간 꿰고 풀기를 반복했어도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는 ‘어정쩡한 사물’이다. 연필을 오래 쥐고 있을 때 팔이 저리고 등이 땀으로 흠뻑 젖는 건 예사고, 식판을 들고 걷는 게 불안해 배식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때면 괜한 미안함과 불편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는 계속해서 사물에 친숙해지려 시도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물은 되레 그의 한계를 상기시키려 한다.

‘모든 도전을 낱낱이 쪼개 보면 남는 말은 견딤과 반복 그리고 지루함이다. (…) 내 삶에서 견딤을 제하면 남는 말들이 없다.’ 사물은 종종 곤혹과 절망을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사물과의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사물이 익숙해질 때까지, 보기에 따라 모습이 어설플지라도 사물을 다루는 스스로의 방식을 깨우칠 때까지, 그래서 ‘불온전함 속 온전함’을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저자는 거듭해 단추를 꿰고 연필을 쥐고 아령을 든다.

그리고 끝내 ‘반복적인 삶이 빚어내는 차이에 의해 성장하는 일’에 성공한다. 거듭된 도전 끝에 조금씩일지라도 몸은 계속해 부드러워지고 움직임도 더 수월해진 것. 설령 몸에 변화가 없을지라도 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삐뚤빼뚤해도 그럴싸한 칼질로 밥 한 끼 뚝딱 차릴 수 있고, 신발끈을 단단히 묶기 어려우니 느슨히 묶는 법을 익히며 사물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온전히 그의 것이 된다. ‘극복할 수 있다’는 말에 도취되지 않고 ‘어차피 존재는 미완’임을 맘 속 깊이 곱씹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미완이기에 계속해 어디로 나아갈지 궁리하고 스스로를 단단히 만드는 삶, 이 또한 사물이 가르쳐주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마주침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말한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 모두는 살면서 수많은 사물과 마주치고, 이를 만지고 길들이며 스스로 성장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가 사물들과 마주하며 만들어낸 파장은 주기와 진폭을 조금씩 달리할 뿐, 다른 모든 이들의 경험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을 터다. 책을 통해 번져오는 파장을 맞자니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길러낸 사물들이 새삼 애틋하게 느껴진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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