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한겨레> 자료사진
불멸의 파우스트
안진태 지음/열린책들·4만5000원
<파우스트>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스물두 살 때 집필을 시작해 죽기 직전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6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인데, 그런 공력이 들어간 만큼 <파우스트>에는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괴테의 모든 사상이 집결해 있다. 독문학자 안진태 강릉원주대 명예교수가 쓴 <불멸의 파우스트>는 괴테 연구자로서 지은이의 투혼이 응집된, 방대한 <파우스트> 해설서다.
고전은 깊은 샘물과 같아서 아무리 퍼내도 그 해석의 물이 마르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파우스트>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은 괴테 사후 처음 출간된 이래 200년 동안 수없이 많은 해석을 산출했다. 그러나 <파우스트>라는 샘은 여전히 맑은 물을 뿜어 올린다. <불멸의 파우스트>도 새로운 해석의 샘물을 맛보게 해주는 책이다. 그 물의 양은 넉넉해서 책의 전체 분량이 1000쪽에 가깝다. 지은이는 <파우스트>를 씨줄로 놓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 <친화력> <서동시집> 같은 괴테의 다른 작품들을 날줄로 삼아 괴테 사상을 종횡으로 엮는다. 거기에 다른 괴테 연구자들과 서구 사상가들의 <파우스트> 해석을 함께 짜 넣어 괴테의 문명관과 역사관을 직조한다.
고전이 대개 그렇듯이 <파우스트>의 줄거리도 괴테의 머리에서 처음 솟아난 것은 아니다. 주인공 파우스트의 역사적 원형은 16세기 초에 독일에서 활동했던 주술사 파우스투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인물이 악마와 결탁해서 세상을 떠돌며 기이한 행각을 벌이다 그 악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파우스투스 이야기는 뒤에 인형극과 유랑극으로 만들어져 독일 민중들 사이에 유행했다. 괴테도 어린 시절 이 인형극을 보았다고 한다. 파우스투스 전설은 영국으로 건너가 1588년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적 이야기>라는 이름의 희곡 작품으로 재탄생시켰고, 이 작품이 독일로 역수입돼 파우스트를 널리 알렸다. 파우스트의 이미지에 획기적으로 변화를 준 것은 18세기 독일 작가 레싱이 쓴 <파우스트 단편>이었다. 여기서 레싱은 파우스트를 ‘앎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품은 진취적 인간으로 그렸고, 바로 그 진취성 덕분에 악마에 희생되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자로 살려냈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파우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바로 이 레싱의 파우스트 해석을 이어받아 그것을 심화하고 드넓게 확장한 작품이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이 등장하는 제1부와 헬레나가 등장하는 제2부로 나뉜다. 괴테는 청년기에 쓰기 시작한 제1부를 58살에 완성했으며, 만년에 제2부 집필에 들어가 82살 때 끝을 보았다. 제1부에서 주인공 파우스트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행동하기를 갈망하는 노학자로 등장한다. 철학·법학·의학·신학을 포함해 모든 학문을 섭렵했으나 여전히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파우스트는 행동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을 겪어보려고 한다. 파우스트의 그런 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을 번역하는 서재 장면이다. 요한복음 첫 구절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느니라”다. 파우스트는 이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했다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아 ‘뜻’으로 옮겨보기도 하고 다시 ‘힘’으로 옮겨보기도 한다. 마지막에 파우스트가 고른 단어가 ‘행위’(행동)이다. 그리하여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라는 말은 파우스트의 그 뒤 삶을 이끌어가는 근본 문장이 된다. 작품 속의 파우스트는 행동하는 인간이다.
60년에 걸쳐 <파우스트>를 완성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한겨레> 자료사진
파우스트의 내부로 좀더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반대방향으로 내달리는 두 가지 욕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극성’을 지은이는 특별히 강조한다. “하늘에서는 더없이 아름다운 별을 원하고 땅에서는 지고의 쾌락을 원하니, 그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줄 것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도입부 ‘천상의 서곡’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는 이 말은 두 방향으로 찢긴 파우스트의 내면을 확연히 보여준다. 하늘의 별, 곧 높은 이상을 지향하면서도 쾌락의 극한까지 가보고자 하는 인간이 파우스트다. 내면이 찢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젊은이로 다시 태어나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쾌락의 탐닉은 파우스트를 무수한 죄악으로 물들게 한다. 제1부에서 파우스트는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해 아이를 낳게 하고, 그레트헨의 어머니와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은 그레트헨은 세상의 비난 속에 정신착란에 빠져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쾌락에 젖은 파우스트는 죄의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행동을 갈망한다.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대 세계로 들어가 그리스 최고의 미인 헬레나를 유혹해 결혼하는가 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공훈을 세우고 황제로부터 바닷가의 넓은 간척지를 하사받는다.
그 뒤로도 파우스트의 무자비한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간척지 개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언덕 위에 살던 선한 노부부를 죽이고 집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 불길 속에서 ‘근심’이라는 마녀가 나와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한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파우스트는 내면의 눈이 뜨이고 그 눈으로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유토피아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 순간을 향해 파우스트는 말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을 때 파우스트는 어떤 쾌락과 기쁨을 맛보더라도 자신은 절대로 만족할 수 없을 거라며, 순간을 향해 ‘멈추라’고 말한다면 제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약속한 터다. 파우스트는 드넓은 간척지에 자유의 공동체를 세운다는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파우스트의 이런 행보에 대한 지은이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파우스트의 모험은 근대 서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욕망하고 정복하는 파우스트가 현대 유럽 문화의 총체적인 초상화이며, 유럽의 역사가 ‘파우스트적인 정신’에 집약돼 있다고 말한다. 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무자비하게 질주하는 파우스트적 이성이 폭력과 독선의 이데올로기를 낳았다며 이런 이데올로기를 “소명과 운명의 신화적 거짓”이라고 질타한다. 이런 평가에 지은이는 공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파우스트야말로 구원받을 만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방황하면서도 열망을 품고 노력하고 추구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선량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에 쫓기더라도 올바른 길을 잃지 않는다.” ‘천상의 서곡’에서 신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하는 이 말은 괴테가 파우스트를 긍정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작품의 결말에서 하늘로 올라간 그레트헨이 성모 마리아에게 파우스트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도 파우스트의 정신이 타락 속에서도 구원받을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단테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상으로 끌어올리듯이, 하늘의 그레트헨이 파우스트를 이끌어 올린다고 말한다. 작품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지은이는 성모 마리아의 모성성으로 이해한다. 모성성이 결함 많은 인간을 껴안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지난해 <파우스트> 새 번역본을 내놓은 전영애 교수(서울대)의 해석과는 차이가 있다. 전 교수는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았는지는 작품 안에서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받기에는 악행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이 문제를 놓고 학계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란과는 무관하게,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의 드라마로서 <파우스트>는 독자에게 여전히 영감과 울림을 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