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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문학한다는 것의 속물스러움

등록 2020-04-17 06:00수정 2020-04-17 11:29

19세기 영국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
문학 현실과 문인들 삶 생생히 그려
100대 영문소설 중 28위에 꼽히기도

세속적 기회주의 평론가 재스퍼
가난에 허덕이는 전업작가 에드윈
두 인물의 상승과 하강이 핵심 구조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 <괴로워하는 시인>. 허름한 다락방 한구석 책상에서 시인이 영감을 찾아 머리를 쥐어뜯는 가운데, 우유 배달부가 찾아와 바느질하는 아내에게 지불 명세서를 내밀고 있다. 조지 기싱의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는 가난에 시달리는 문인들의 몸부림을 담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 <괴로워하는 시인>. 허름한 다락방 한구석 책상에서 시인이 영감을 찾아 머리를 쥐어뜯는 가운데, 우유 배달부가 찾아와 바느질하는 아내에게 지불 명세서를 내밀고 있다. 조지 기싱의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는 가난에 시달리는 문인들의 몸부림을 담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뉴 그럽 스트리트

조지 기싱 지음, 구원 옮김/코호북스·1만3000원

19세기 영국 작가 조지 기싱(1857~1903)의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1891)는 영문학 사상 처음으로 문학 현실과 문인들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로 꼽힌다. 그럽 스트리트는 19세기 초까지 영국 런던에 있었던 거리로, 가난한 문인들과 작가 지망생들, 출판업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기싱의 소설 제목은 구체적인 지명은 아니고 문인들과 작가 지망생들로 이루어진 무형의 ‘문단’을 가리키는 비유적 의미로 쓰였다.

이 소설의 중심 인물은 비평가 재스퍼 밀베인과 소설가 에드윈 리어던. 재스퍼와 에드윈은 친구 사이지만 서로 장르가 다른 것 이상으로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관 자체에서도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 전체 37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첫 장은 재스퍼의 사람됨과 문학적 포부를 소개하는 구실을 한다. 여기서 재스퍼는 아직 본격적으로 문단에 진출하기 전인데, 나름대로 확고한 문학관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두 여동생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라.

“나는 사업을 배우고 있어. 요즘 시대에 문학 활동이란 장사거든. 우주의 힘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몇몇 천재 작가를 제외하면, 이 시대에 글로써 성공한 사람들은 수완 좋은 장사꾼이야. (…) 나로 말하자면, 내 글은 대중에게 잘 먹히지 않아. 그런 방면에는 재능이 없어. 그래서 내 독자는 중상층 지식인, 즉 자기들이 특별히 영리한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밥인지 죽인지 구분도 못 하는 사람들이야.”

이에 반해 에드윈은 몇 권의 소설을 냈고 그중 적어도 한 편은 평단과 독자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도 얻은 기성 작가인데, 소설이 시작될 무렵에는 슬럼프에 빠진 채 악전고투하는 중이다. 그는 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쓴 소설 <중립 지대에서>가 성공을 거두면서 미모의 문학 애호가 에이미 율과 결혼하고 전업 작가의 삶을 택하지만, 그 뒤로는 발표하는 소설마다 실패를 거듭하며 점점 가난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 에드윈을 향해 에이미는 재스퍼를 흉내내 “이제는 시장을 겨냥해서 써야 해요”라 다그치는가 하면, 작가로서 명성과 영예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압박을 가한다.

“당신만큼 책을 쓰고도 절망적인 가난으로 빠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순진한(?) 문학 애호가 에이미는 남편에게 말하는데, 에드윈의 대답은 간명하다. “너무나 많아요.” 에드윈의 단호한 대답에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하나가 들어 있다. 문학이라는 업은 성실과 열정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 남편은 “초반에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명성을 쌓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다며, 그들의 삶이 “빈곤과 좌절과 비참한 죽음”으로 귀결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말이 에드윈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사실을 책을 다 읽은 독자는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가난한 문인들이 거주했던 그럽 스트리트를 그린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가난한 문인들이 거주했던 그럽 스트리트를 그린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잡지에 평론을 투고해 싣는 것으로 시작한 재스퍼의 문단 활동은 특유의 사업 수완(?) 덕택에 승승장구하는 반면, 에드윈은 몇 번이고 작품을 시작했다가는 포기하고 억지로나마 끝을 내서 출간한 책들은 흥행에도 실패하고 비평가들의 혹평 아니면 외면에 직면하면서 극도의 가난으로 내몰린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재스퍼의 상승과 에드윈의 추락이 교차하며 이루는 엑스(X)자 모양 움직임을 보인다. 에드윈이 비참한 죽음을 맞은 뒤 재스퍼가 저명 문예지의 편집장 자리를 꿰찬 데 더해 거액의 유산을 상속 받은 에이미와 결혼해 그토록 꿈꾸던 여유와 사치를 만끽하는 결말에서 그 움직임은 절정에 이른다.

<뉴 그럽 스트리트>는 예술혼과 생계의 조화를 꿈꾸며 분투하는 문인들의 몸부림을 그리는 한편, 일반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문학계의 민낯을 여지없이 들춰낸다. 가령 원로 문인 앨프리드 율은 과거 자신이 문예지 편집장 시절 데리고 있던 젊은 평론가 패지가 경쟁 문예지로 자리를 옮긴 뒤 자신의 글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서평을 쓴 데 대해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이제는 문단의 실력자가 된 그 패지 아래로 들어간 재스퍼가 자신의 딸 메리언에게 청혼했을 때에도 앨프리드는 극구 반대하는데, 그 배경에는 패지의 이름으로 발표된 자신에 대한 비평을 실제로는 재스퍼가 썼다는 의심이 자리해 있다. 친구라는 이유로 비펜의 소설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재스퍼도 그렇고, 자신의 작품을 비판하는 평론가들을 향해 “평론가들 따위 나가 뒈지라지!”라며 저주를 퍼붓는 에드윈의 모습 역시 문단의 감추고픈 본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례라 하겠다.

누가 뭐래도 문학은 작품으로 수렴되고 독서와 비평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시와 소설 같은 작품을 백조의 우아한 헤엄이라 한다면, 수면 아래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발운동은 문학의 숨은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영국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가 21세기 한국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주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보편적 가치 때문이리라. 문학은 적응과 도태, 치열한 생존투쟁이 벌어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며, 문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정과 시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인상적으로 그려 보인다. 영국 작가 로버트 맥크럼이 2015년 <가디언>에 소개한 ‘최고의 영문 소설 100’ 목록에서 28위에 오른 작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조지 기싱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조지 기싱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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