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시대를 살며 감당했던 문제들과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들을 엿보는 재미로 우리는 역사 속 여성들을 만나곤 한다. 바로 이웃에 사는 듯 공감을 불러오는 유형이 대다수지만, 운명인지 업보인지 박수를 쳐주고 싶은 잘 풀린 인생도 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안타까운 사람도 있다. 기록으로 전해 오는, 억울하고 비극적인 삶으로는 강빈(姜嬪, 1611~1646)만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의금부 도사가 검은 가마에 강빈을 태워 선인문을 나가는 장면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강빈은 17살에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 빈에 간택되는데, 별궁에서 가례를 준비하는 3개월 동안 부친 강석기에게 소학을 배운다. 세자빈 생활 10년에 병자호란의 볼모가 되어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청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간다. 돌도 안 된 원손을 안고 2달 남짓의 노정으로 심양에 도착한 강빈은 1645년 귀국할 때까지 8년을 그곳에서 생활한다. 당시 청은 명나라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을 심하게 압박했는데, 세자 부부는 청국과 조선 양국에서 의심을 받는 처지였다. 강빈은 늘 불안증세나 복통과 곽란 등 여러 질병에 시달리면서 2남 4녀의 자녀까지 낳는다. 8년 내내 임신과 출산의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청 쪽 요구에 응하느라 세자가 자리라도 비우면 강빈이 공무를 대신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심양관의 운영 경비를 대주던 청이 연이은 흉년과 식량난으로 지급을 중지하자 상주인구 500여 인의 비용을 직접 충당하기 위해 둔전을 경작한다. 이 소출을 기반으로 교역하기에 이르고 강빈도 적극 가담한 것으로 나오는데, 아마도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기마와 사냥에도 능한 만주족 여성들이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그는 조선왕국의 세자빈으로 또 차기 왕비로서 정세의 변화를 현장에서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세자 부부는 많은 재물을 싣고 귀국하는데, 특히 강빈은 수놓은 비단과 금은보화를 많이 갖고 와 황금 160냥과 은 1만 650냥은 남기고 다 나누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 1년 만에 강빈은 청국과 결탁한 왕위 교체와 홍금적의(紅錦翟衣)를 미리 만들어 왕비를 꿈꾸었다는 죄목을 쓰고 사약을 받게 된다. 그가 겪은 비극을 헤아려 보면 사실 1년도 너무 길다. 우선, 귀국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연이어 장녀가 죽음을 맞이한다. 믿고 의지할 가족들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강빈은, 설상가상 궁궐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고 만다. 왕과 소의 조씨 그리고 김자점의 합작으로 궁궐 내 친강빈 파로 판단된 모든 사람이 추방되거나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강빈은 임금의 처소에 가서 소란을 피우고 문안하는 예를 그만두었던 것 같다. 이 또한 강빈을 사사(賜死)시켜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강빈의 형제 4명이 오지 유배령에 떨어지고, 다시 곤장을 맞다 죽는다. 결정적으로 왕의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고 강빈의 짓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어선(御膳)에 접근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물증 없이 심증으로만 며느리를 옭아매는 왕의 ‘광란’에 대신들은 치를 떨었다.
세자빈의 죽음에 신료와 백성이 동요하자 다시 여죄를 만들어 70살에 이른 강빈의 노모 신예옥(申禮玉)을 끌어내어 형장을 가한 후 죽이는 잔혹함을 보인다. 강빈의 11살 8살 4살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위로 두 명은 그곳에서 죽는다. 강빈이 자녀 혼수에 쓰고자 남겨 둔 금은보화는 주인을 찾지 못한다. 강빈의 신원(伸冤)을 도덕적 의무로 여긴 온 백성의 마음으로 70년이 지나서야 그는 모든 의혹을 벗고 ‘슬픔을 위로한다’는 뜻의 민회(愍懷)를 시호로 받는다. 세자 부부가 청국 황족과 친교를 맺고 원만한 관계를 이룬 것이 부담이었다는 완곡한 표현 말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왜곡된 권력 행사를 제대로 따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