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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느 퀴어 소설가의 운명애 선언

등록 2020-05-08 06:01수정 2020-05-08 09:54

소설가 김봉곤. ⓒ김주성
소설가 김봉곤. ⓒ김주성

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창비·1만4000원

“나는 나의 삶을 쓴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

김봉곤은 자신의 두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에 붙인 ‘작가의 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떠오르게 하는 이 문장은 게이 소설가 김봉곤의 운명애와 소설 작법을 선언적으로 요약해 보인다. 그렇지만 성소수자 작가로서 김봉곤이 운명애에 이르기까지는 곡절과 장벽이 없지 않았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그런 생활’은 그가 맞닥뜨리고 넘어서야 했던 장벽의 일부를 보여준다.

“니 진짜로 그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

게이 소설가의 사랑을 그린 아들의 자전적 소설을 읽은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 생활’이 어떤 생활을 가리키는지 뻔히 아는 아들은 잠시 말을 돌리다가 이내 수긍하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어머니는 다시 묻는다. “…니 그러면 아직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나?” ‘그런 생활’의 주인공은 아들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과 사귀면서도 전 애인들과 관계를 끊지 못하는 애인이라는 이중의 벽을 상대해야 한다. 어머니에게는 상처를 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애인은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결론은 해피엔딩. “그도 엄마도 때로는 상처가 될 만큼 진부한 말을 내뱉고 때로는 미칠 듯이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표제작 ‘시절과 기분’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 혜인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혜인이 ‘나’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도 ‘나’의 소설이 나온 뒤의 일이거니와, 본의 아니게 혜인을 속였던 데 대한 미안함이 “가슴 안쪽을 고운 사포로 긁어내리는 듯한 기분” “어딘가 꿰뚫린 기분” “조금은 서글픈 기분”처럼 다종다양한 ‘기분’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다른 단편 ‘데이 포 나이트’는 ‘첫’ 경험을 다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게이라고까지 인정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나’가 학교에서 만난 에스(S)형에게 “첫눈에 반해버렸고,” 또 다른 남자 선배와는 폭력과 고통을 수반하는 ‘첫’ 경험을 하며 게이로서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소설은 강의를 위해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나’가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런 회고 끝에 그가 “‘첫’이 아닌 것들의 의미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지금의 자신을 평가할 때, 독자는 거기에서 성숙한 운명애의 한 사례를 보게 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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