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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역사의 영혼’을 빚어내는 슬픔의 힘

등록 2020-05-29 06:00수정 2020-05-29 15:38

슬픔의 힘을 믿는다
정찬 지음/교양인·1만5000원

<슬픔의 힘을 믿는다>는 소설가 정찬(사진)의 첫 산문집이다. 1983년 무크 <언어의 세계>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니 작가 생활 37년 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20, 30년씩 묵은 글들을 새삼 그러모은 건 아니다. <한겨레>에 쓴 칼럼을 중심으로, 대체로 2015년 이후 쓴 글들이어서 읽기에 괴리감이 없다.

책 앞부분에는 주로 작고한 문인과 예술가에 관한 글들이 배치됐다. 이덕희, 채영주, 기형도, 허수경, 김윤식처럼 생전에 교유를 맺었던 이들을 비롯해 윤이상, 랭보, 카뮈, 카프카 등 나라 안팎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차분히 돌아보고 그 의미를 평가한다. “작가의 죽음이 여느 죽음과 약간 다른 것은 작품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허수경에 관한 글에서 그가 쓴 대로, “스스로의 빛으로 삶과 죽음을 비”추는 작품의 존재는 예술가들의 삶과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만든다.

책 제목은 폴란드의 현대음악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1933~2010)에 관한 글에서 왔다. 정찬은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과 제목이 같은 중편 ‘슬픔의 노래’를 쓴 바 있는데, 이 자전적 작품에서 작가이자 기자인 ‘나’는 폴란드에 가서 구레츠키를 인터뷰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돌아본다. 나치 수용소에 갇힌 소녀의 기도문이 삽입된 구레츠키의 교향곡은 소설에서 5·18 광주 민중항쟁과 연결되며, 그 핵심에 슬픔이 있다.

“나는 인간이 가진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슬퍼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슬픔 속에는 원한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다.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 슬픔이다.”

“문학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역사란 문학이라는 꿈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풍경의 일부분일 뿐이었다”던 대학생 정찬에게 유신에 항거한 서울 농대생 김상진의 할복자살(1975년)은 문학과 역사의 뗄 수 없는 관계를 각인시킨 ‘사건’이었고 마침내 ‘5월 광주’는 “혁명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희생을 품은 죽음이라는 점에서 5월 광주는 1987년 1월 박종철의 ‘정화된 죽음’으로, 다시 “캄캄한 한국 사회에 빛을 비춘”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용산 참사가 있었고 ‘4대강’의 희생이 있었다. 하릴없고 억울한 죽음과 희생은 그러나 슬픔의 힘으로 정화되어 ‘역사의 영혼’이 된다. “촛불 시민 혁명이 일으킨 기적의 주체는 역사의 영혼들이었다.” 그가 슬픔의 힘을 믿는 까닭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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