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 지음/교양인·1만5000원 <슬픔의 힘을 믿는다>는 소설가 정찬(사진)의 첫 산문집이다. 1983년 무크 <언어의 세계>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니 작가 생활 37년 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20, 30년씩 묵은 글들을 새삼 그러모은 건 아니다. <한겨레>에 쓴 칼럼을 중심으로, 대체로 2015년 이후 쓴 글들이어서 읽기에 괴리감이 없다. 책 앞부분에는 주로 작고한 문인과 예술가에 관한 글들이 배치됐다. 이덕희, 채영주, 기형도, 허수경, 김윤식처럼 생전에 교유를 맺었던 이들을 비롯해 윤이상, 랭보, 카뮈, 카프카 등 나라 안팎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차분히 돌아보고 그 의미를 평가한다. “작가의 죽음이 여느 죽음과 약간 다른 것은 작품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허수경에 관한 글에서 그가 쓴 대로, “스스로의 빛으로 삶과 죽음을 비”추는 작품의 존재는 예술가들의 삶과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만든다. 책 제목은 폴란드의 현대음악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1933~2010)에 관한 글에서 왔다. 정찬은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과 제목이 같은 중편 ‘슬픔의 노래’를 쓴 바 있는데, 이 자전적 작품에서 작가이자 기자인 ‘나’는 폴란드에 가서 구레츠키를 인터뷰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돌아본다. 나치 수용소에 갇힌 소녀의 기도문이 삽입된 구레츠키의 교향곡은 소설에서 5·18 광주 민중항쟁과 연결되며, 그 핵심에 슬픔이 있다. “나는 인간이 가진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슬퍼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슬픔 속에는 원한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다.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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