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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 연합이 키운 불평등체제 혁파해야”

등록 2020-05-29 06:01수정 2020-05-29 08:16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전작보다 더 급진적 대안 내놔
불평등 정당화 이데올로기 해부하고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국가’ 제창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문학동네·3만8000원

‘피케티 패닉’.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2014년 토마 피케티(49·파리경제대 교수)의 <21세기 자본>이 일으킨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크루그먼의 말대로 피케티는 이 책 한 권으로 세계 경제학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2013년 출간 이후 <21세기 자본>은 30여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200만부 넘게 팔렸다. 800쪽에 이르는 두꺼운 경제학 책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마치 반세기 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출간되자마자 ‘아침 빵’처럼 팔려나갔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로써 피케티는 우리 시대의 경제적 불평등 현상을 고발하는 가장 힘 있는 경제학자로 등장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198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확대됐음을 통계적 방법으로 입증하고, 이대로 가면 과거의 세습자본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동시에 이 책은 이런 암울한 미래를 막으려면 최고 80%에 이르는 누진소득세를 시행하고 국제적 연대를 통해 세계자본세를 도입함으로써 ‘사회국가’(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일까? 피케티는 <21세기 자본> 출간 이후 6년 만에 더 강력하고 야심 찬 저작을 지구촌 사회에 들이밀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간되고 이번에 한국어판이 나온 <자본과 이데올로기>다.

&lt;자본과 이데올로기&gt;를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lt;자본과 이데올로기&gt;는 유럽의 역사를 뼈대로 하고 그들 식민지와 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포괄해 불평등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살핀다. © AFP, JOESL SAGET, 문학동네 제공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유럽의 역사를 뼈대로 하고 그들 식민지와 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포괄해 불평등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살핀다. © AFP, JOESL SAGET, 문학동네 제공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21세기 자본>보다 500쪽이나 부피가 늘어나 전체 분량이 1300쪽에 이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경제에 머물러 있던 시야를 역사와 정치로 확대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피케티는 유럽의 역사를 뼈대로 하고 여기에 유럽 식민지였던 지역과 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포괄해 그야말로 지구적 시야에서 불평등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살핀다. 특히 이번 책에서 피케티는 불평등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알려면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를 알아야 하며, 정치행위자들의 사고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사 이래 모든 사회는 불평등한 사회였으며, 이 사회들은 저마다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행위를 지배하고 정치 행위는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이 책은 역사학과 정치학 그리고 이데올로기론을 포괄한 독특한 경제학 책이 됐다. 책의 제목이 ‘자본과 이데올로기’인 이유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는 출간되기 전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라는 대립항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를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대립항의 함의를 풍부히 이해하려면 피케티와 함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 필요하다. 피케티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특징짓는 ‘삼원사회’를 들여다본다. 피케티의 표현을 따르면, 삼원사회란 오라토레스(기도하는 자들, 사제), 벨라토레스(전쟁하는 자들, 귀족), 라보라토레스(노동하는 자들, 평민)이라는 세 계급으로 이뤄진 사회를 가리킨다. 이 세 계급 가운데 사제와 귀족이 지배계급을 이루고 평민이 피지배계급으로서 경제적 생산을 담당한다. 프랑스 구체제가 전형으로 보여주는 이 삼원사회는 지구촌의 다른 전근대사회에서도 넓게 확인된다. 프랑스혁명은 이 삼원체제를 무너뜨리고 만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근대사회를 열었다.

그러나 혁명이 창출한 ‘평등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불평등 사회였다. 불평등은 19세기 내내 커져 20세기 초에 극한에 이르렀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표현한 비율(‘r〉g’)을 이용하면, 이 시기에 민간자본 수익률(r)은 국민소득 성장률(g)의 6배에 이르렀다. 자본으로 얻는 수익이 노동으로 얻는 수익을 압도한 것이다. 이 시기를 프랑스 문예사조에서는 ‘벨에포크’ 곧 아름다운 시대라고 부르지만, 자본가와 부유층에게만 ‘아름다운 시대’였던 셈이다. 이런 극단적 불평등은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는 중에 국가가 강력한 누진소득세를 시행하면서 급속히 완화됐다. 미국에서 뉴딜정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30여 년에 이르는 ‘자본주의 황금기’에 미국과 영국에서 누진소득세는 80~90%에 이르렀고, 경제적 불평등을 알려주는 ‘피케티 비율’은 2~3배까지 낮아졌다. 그랬던 것이 대처-레이건의 ‘보수혁명’과 연이은 공산주의체제 몰락 이후 피케티 비율은 다시 솟아올라 20세기 초와 유사한 상황으로 돌아갔다.

2018년 10월30일 서울 용산 서울드래곤시티호텔에서 한겨레신문사 주최로 열린 제9회 아시아미래포럼 개회식에서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뒤의 그래프는 1980~2016년 사이 미국·캐나다 등 세계 주요 국가의 상위 10%의 소득 비중 변화를 나타낸다. 지난 30여년 사이 미국의 상위 10%의 소득 비중이 3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으로 크게 오른 것을 비롯해 모든 나라에서 소득격차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2018년 10월30일 서울 용산 서울드래곤시티호텔에서 한겨레신문사 주최로 열린 제9회 아시아미래포럼 개회식에서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뒤의 그래프는 1980~2016년 사이 미국·캐나다 등 세계 주요 국가의 상위 10%의 소득 비중 변화를 나타낸다. 지난 30여년 사이 미국의 상위 10%의 소득 비중이 3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으로 크게 오른 것을 비롯해 모든 나라에서 소득격차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피케티는 1980년대 이후 이렇게 불평등이 커지는 데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정치에서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 체제가 가동됐다고 말한다. 브라만 좌파가 사민주의 계열 정당을 지지하는 고학력층을 뜻한다면, 상인 우파는 전통적으로 보수당을 지지해온 자본가와 부유층을 가리킨다. 피케티는 1970년대까지 주로 노동자계급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던 사민주의 계열 정당이 점차로 고학력자를 대변하게 되면서 ‘브라만 좌파’로 변질했다고 말한다.

토마 피케티가 2014년 5월12일 파리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세를 취했다. 당시 43살의 피케티가 쓴 &lt;21세기 자본&gt;은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는 ‘록스타 경제학자’로 일컬어지며 찬사와 독설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로이터 연합뉴스
토마 피케티가 2014년 5월12일 파리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세를 취했다. 당시 43살의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은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는 ‘록스타 경제학자’로 일컬어지며 찬사와 독설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로이터 연합뉴스

브라만 좌파는 상인 우파와 어떤 동질성 혹은 유사성을 공유한다. “브라만 좌파는 학문에서 노력과 능력을 믿는다. 상인 우파는 사업에서 노력과 능력을 믿는다. 브라만 좌파는 학력, 지식, 인적 자본의 축적을 지향한다. 상인 우파는 화폐, 금융자본의 축적에 의거한다.” 물론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만 좌파는 자신들의 관심사인 교육제도와 문화예술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상인 우파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러나 브라만 좌파가 주장하는 세금 인상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는 교대로 정권을 장악하거나 때로는 공동으로 집권하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근대혁명 이전의 삼원사회에서 나타난 사제-귀족 지배체제의 복사판에 가깝다.

이런 엘리트 지배 체제에서 하층민을 대변해줄 정당은 사라지고 만다. 피케티는 지배체제에서 밀려난 하층민이 우익 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잠재적 경쟁자인 이주민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 새로운 삼원체제가 해체되지 않는 한, 토착민(네이티브)만의 평등주의와 이방인의 폭력적 배제를 근간으로 하는 극우 포퓰리즘 바람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극단화한 이 삼원사회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케티는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참여사회주의는 자본의 ‘사회적 소유’와 ‘일시적 소유’를 핵심으로 한다. 사회적 소유란 독일에서 일부 시행하고 있듯이 종업원들이 기업권력을 나누어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일시적 소유’란 강력한 누진소유세를 시행해 자본이 세습되지 않고 당대에 그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이 누진세로 모은 세금을 활용해 국가가 모든 25살 성인에게 일정액의 자산을 지원함으로써 직업인으로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케티는 이런 사회변화를 위해 국가들이 연대하는 ‘사회연방주의’를 제창한다.

지난 2018년 10월30일 용산 드래곤시티호텔에서 연 한겨레신문 주최 아시아미래포럼에 참석한 토마 피케티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lt;한겨레&gt; 자료사진
지난 2018년 10월30일 용산 드래곤시티호텔에서 연 한겨레신문 주최 아시아미래포럼에 참석한 토마 피케티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대안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피케티는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를 넘어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에 기반을 둔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다. 이런 말을 할 때, 또 사회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피케티는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통렬하게 고발했던 <거대한 전환>의 칼 폴라니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21세기 자본>의 피케티보다 좀더 급진적인 피케티가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피케티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난제가 크다는 뜻일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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