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1만원
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1만원
자연 난도질하며 자연미 찬양하는 ‘분열’ 성찰
‘로고스와 기계’가 빚은 대립의 자연관 역사 훓으며
인간중심주의 ‘대오각성’ 촉구
깨달음만이 풀벌레의 울음에 공명할 수 있다
‘로고스와 기계’가 빚은 대립의 자연관 역사 훓으며
인간중심주의 ‘대오각성’ 촉구
깨달음만이 풀벌레의 울음에 공명할 수 있다
땅, 물, 하늘을 마주하는 내 마음의 울림에 가만히 귀기울여보자. 땅에 기는 것들, 하늘에 나는 것들, 물에 헤엄치는 것들, 그리고 풀, 나무, 돌멩이, 벌레들에서 우리는 얼마나 ‘함께울림’(공명)을 느껴볼 수 있을까? 문득 쳐다본 무지개에서 우리는 어떤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가, 또는 해돋이를 기다리며 얼마나 가슴 두근거림을 느끼며 사는가?
민중의 편에 선 ‘자립과학’을 하겠다며 교수직을 버리고 시민과학자와 반핵운동가로 살았던 일본인 다카기 진자부로(1938~2000)의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녹색평론사 펴냄)는 우리 자체가 자연인데도 우리에게서 자연을 나누어 점점 더 멀리 밀쳐내며 살아온 인간문명의 ‘분열된 자연관’에 대한 성찰이다. 특히 자연을 지배 대상으로 바라본 서구문명의 자연관에 대한 비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은이는 자연 안에서 ‘함께 울림’을 위해 우리 안에 꼭꼭 숨은 자연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자연을 지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성과 과학이 이룬 문명을 다 버리지도 않으면서 ‘그들과 우리’가 아니라 ‘다함께 우리’로 살아가는 마음을 되찾자는 거다.
그가 통찰하는 ‘분열된 자연관’이란, “한편에서 우리는 자연의 정복자로서 날카로운 칼로 자연을 난도질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흡사 보상행위인 양 마치 자연미를 찬양하는 것 같은 문화를 발달시켜” 온 ‘두 개의 자연’을 뜻한다. 과학자의 마음과 시인의 마음은 이런 분열의 상징이다.
우리 안에 꼭꼭 숨은 자연성 회복을
자연성의 재발견엔 각성과 감동이 필요하다. 지은이는 고대 그리스 문명부터 현대 과학기술에 이르는 자연관의 역사를 훑은 뒤, 책의 말미에 인용한 김지하의 ‘옥중 에피소드’에서 이런 각성과 감동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1985년 <신동아>에 실린 김지하의 글이다. “…운동을 하려고 밖에 나가서 담을 보니까, 스카이라인을 따라 틈이 생기지 않도록 평평하게 시멘트를 발라놓았던 것인데, 가만히 보니까 조그만 틈새에 풀이 나 있었습니다. 봄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꽃까지 피었더라구요. 방으로 들어와서는 직업이 글쓰기인지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와 종일토록 울었습니다. 고등생명인 내가 틈새에 난 풀만도 못하다는 생각도 했죠. 그러고 나서,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마음에 새겨보기도 했습니다. …봄이 되면 흰 민들래씨가 공중에서 날아와서 쇠창살까지 들어옵니다. 상징적인 얘기지만, 그놈들은 무서워하지도 않고 감방 속으로 들어옵니다.”(이 책 236쪽)
이건 지금의 상황을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고 지은이는 풀이했다. 감방 안에 갇힌 수감자는 생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에 비유될 만하고, 콘크리트까지도 물어뜯으며 소생하는 자연 생명력과 우리 사이의 끈끈한 일체감을 발견하는 수감자의 감동은 자연에 대한 참다운 각성의 시작으로 이해됐다.
그렇지만 이처럼 작지만 깊은 감동도 우리의 ‘대오각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빗댄다면, ‘깨달은만큼 느낀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 책은 오랜 서구 문명의 분열된 자연관에 대한 반성, 새로운 생태주의 자연관에 대한 깨달음에 바쳐졌다.
분열된 자연은 어디에서 싹터 어떻게 진행됐는가? 제1부의 이야기는 머나먼 신화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엇보다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기술의 지혜를 불과 함께 훔쳐내어 인간에게 주었다’는 고대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런 지배의 자연관이 출발한 곳 언저리에 있다. 프로메테우스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좋아했다는 제우스의 대립은 두 개의 자연, 분열된 자연이라는 영원한 대립을 만들어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자연은 망한다는 생각도 인간중심
자연을 신화에서 끄집어낸 신화 이후 시대에선 ‘로고스(논리)’와 ‘기계’가 서구 문명의 자연관을 지배했던 열쇳말이었다. 모든 자연은 합목적에 따라 설명되는 ‘논리(로고스)’여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은 중세의 우주관까지 이어졌고,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으로 시작한 근대과학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깨부수는 데 기여했으나, 한편으로는 ‘기계’를 닮은 자연은 이용과 조작의 대상으로 이해됐다. 근대를 상징하는 ‘기계적 자연관’이다.
지은이는 현대의 상대성이론과 우주론에 담긴 자연관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다. 이 가운데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세계의 다양성들을 더욱 단순한 법칙 안으로 통합하려 한 ‘절대주의’에 서 있다는 비판이나, 보편적 우주원리를 강화한 현대 우주론은 근대의 기계적이고 인간중심적 우주관을 더욱 추상화한 데 불과하다는 비판은 눈길을 끌 만하다.
그렇다면 왜곡된 자연관에서 벗어나 땅, 물, 하늘, 다른 생명들과 함께울림을 느끼는 새로운 자연관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까? 지은이의 눈에는 철저한 대오각성이 필요한 일이다.
편견의 뿌리는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은 자연계의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은 우위자이며, 세련된 지성이라든가 섬세한 감성 등은 인간에게만 있다는 사상이 있다.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이나 이성의 절대보편성에 대한 신앙은, 대부분 이러한 편견에 원인이 있다.” 심지어 우리를 둘러싼 자연상황에 지나치게 절망적인 태도조차도 인간중심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연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일 것이다. 자연이 그렇게 간단하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한편의 진실이다.”(236~237쪽)
그건 여전히 계속하여 찾아나서야 할 길이다. 무엇이 자연 안에서 자연인 채로 자연과 나뉘지 않으면서도 인간다움의 문명을 지키며 사는 길일까? 과학자와 시인의 마음을 모두 품는 우리의 삶은 어디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세세한 답들을 책에서 찾지는 못할지라도, 개인과 인류 공동체가 맞이했거나 맞이할 각성의 필요성과 감동의 기쁨을 엿볼 수는 있겠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자연을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자연관은 본디 존재하는 게 아니라 중세·근대를 거치며 강화해온 역사의 산물이다. 이제, 생태 위기 시대에 우리는 자연과 공명하는 삶의 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다카기 진자부로는 인간중심의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 우리 내면의 자연성을 깨닫는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림은 이미 멸종했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 61종들. <생명의 미래>(에드워드 윌슨, 사이언스북스) 책 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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