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리 지음/한겨레출판·1만3800원 “기억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미연’의 상념으로 읽히는 문장이 눈길을 잡는다. 소설 속엔 “표백할 수 없는 날들”에 대한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 제 편의대로 지우고 사는 이들이 공존하며, 대비되는 그들의 태도 속에 ‘고여 있는 과거’는 지금, 여기에 서서히 재현된다. <은희>는 1975~87년 복지시설이란 이름으로 노숙인, 부랑자와 일반 시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3천명이 강제수용됐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바탕이 됐다. 513명이 사망에 이르는 등 인권유린이 자행된 사실에 ‘은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창작한 이야기를 뒤섞은 이 소설은 그곳의 참상을 드러내는 데만 몰두하지 않는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했던 기자이기도 한 지은이 박유리는 소설의 묘미를 살려 독자들에게 “묻어두거나 길어 올려야 할 저마다의 과거” 앞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자문하게 한다. 어린 나이에 ‘형제의집’에 끌려가 끔찍한 시간을 겪었던 미연에게 참상을 태생으로 증명하는 폴란드 입양아 ‘준’은 끊어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기억을 불러들인다. 준은 현재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존재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그때를 서성”이던 이들을 진실 앞에 서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에서 가해자가 마땅한 처벌을 받지 않고 아픔은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남는 일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소설의 결말은 한편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얼마 전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돼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이 소설이 멈춰 있던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다시 흐르게 하는 가슴 시린 초침이 돼줄 듯하다. 강경은 기자 free192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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