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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 손이 내 손을 잡아 일으킨다

등록 2020-06-05 06:00수정 2020-06-05 09:45

카프카식 이별
김경미 지음/문학판·1만4000원

김경미(사진) 시인은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 방송작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국방송(KBS) 클래식 에프엠(FM) 오전 9~11시 프로그램 <김미숙의 가정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새 시집 <카프카식 이별>은 이 프로그램의 문을 여는 ‘오프닝 시’와 시에 대한 설명 또는 뒷말을 함께 담은 책이다.

프로그램 이름에서 보다시피 이 방송의 주 청취자는 아마도 전업주부와 퇴직자, 청년·학생처럼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는 이들일 것이다. 아니면 커피숍이나 버스 및 택시처럼 영업 공간에서 배경음악 삼아 틀어 놓지 않을까. 어느 경우든 전문적인 시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인으로서는 시에 대한 문학적 엄격함을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채 숙성할 시간도 없는 더없이 가볍고 풋내 나는 경거망동의 시작(詩作)이 오히려 유례없이 울창하고 무성한 시의 숲을 거니는 것 같은 묵직함으로 다가왔다.”(‘서문’)

서문에서 시인은 ‘본격시’와 ‘대중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 시집의 시들을 대중시라 한다면 그것은 싸구려 감상에 호소한다는 뜻이 아니라 보편적 울림을 지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랑과 이별, 자연과 일상, 나와 세계, 무거움과 가벼움… 우리 삶의 수많은 계기와 국면이 시로 몸을 바꾸어 청취자들에게 찾아간다. 읽기 전에 듣는 시라서 리듬감과 순발력이 특히 중요하다.

시집 맨 앞에 실린 시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는 꽃이 나뭇가지에서 피어날 때와 허공에 흩날릴 때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을 때, 이렇게 세 번씩 핀다는 깨달음을 담았다. “그중 떨어져서 길을 물들이는 바닥의 꽃들이 제일 아름답고 힘이 되는 날도 있습니다”라는 ‘뒷말’에 이 시의 핵심이 들어 있다.

“생각과는 다른 연애를 세 번 하고 나니/ 이십대가 다 갔다/ 사표를 네 번밖에 안 썼는데 이십대가 다 갔다// 다섯 번째 이사하던 날// 짐 다 끌어낸 허름한 한 칸 빈방이/ 내 이십대의 전부 같아서,/ 다가올 내 서른 살의 예고 같아서/ 눈물 와락 쏟아지는데”

‘장갑이라는 새’의 앞부분은 이십대의 연애와 사표와 이사를 2에서 5까지 숫자의 나열로 재치있게 요약한다. 날렵한 시적 발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막막하기만 한 화자는 문득 잃어버려서 속상했던 장갑 한짝을 구석에서 발견한다. “가서 집어드니// 내 손이 내 손을 훌쩍 잡아 일으킨다// 두 손에서 새 두 마리 훨훨 날아오른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장갑 한짝에서는 어쩐지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연상된다.

마지막으로, 이즈음에 맞춤한 시 ‘유월의 결심들’을 읽는다.

“시간 낭비하기!/ - 집에서 정거장까지/ 장미꽃 좀 더 많은 길로 빙 돌아서 다니기// (…) // 가벼워지기/ - 육월이 기역 받침 떨어내고 가벼운 유월 되듯이/ 너무 많은 결심이나 각오의 추 매달지 않기”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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