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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심시선과 기세 좋은 여자들

등록 2020-06-05 06:00수정 2020-06-05 10:40

정세랑 소설 ‘시선으로부터,’ 출간
주체적 여성 심시선 10주기 맞아
‘제사’차 하와이에 모인 자손들

하와이, 뒤셀도르프 거친 여정
여성 예술가로서 분투와 유산
“20세기 여성에 대한 사랑 담아”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었던 여성 작가 심시선과 그 자손들 이야기를 쓴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작가 정세랑.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 나의 계보(…)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었던 여성 작가 심시선과 그 자손들 이야기를 쓴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작가 정세랑.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 나의 계보(…)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문학동네·1만4000원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던 일가족 열두명이 하와이로 향한다. 그들의 (시)어머니이거나 장모 또는 할머니인 한 사람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제사의 주인공인 심시선은 젊은 시절 하와이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이렇게 하와이에 모인 일가족과 그들의 조상인 심시선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들려준다.

심시선이 하와이에 간 것은 전쟁중에 가족이 몰살 당하고 혼자만 남게 되었기 때문. 일본 유학을 다녀온 오빠가 간첩으로 몰리면서 마침 집에 없던 시선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모두 끌려가 변을 당했다. ‘사진 신부’로 위장해 하와이로 건너가 세탁 일 등을 하는 한편 화가의 꿈을 키우던 시선은 독일에서 여행 온 유명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의 눈에 띄어 그와 함께 독일로 건너간다. “나는 잡역부였고 조수였고 아주 가끔 제자였다.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분풀이 대상이었고 말이다.”

“마티아스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하여 뒤셀도르프로 데려왔던 여자들”처럼 그의 그림 모델이나 파티의 ‘장식물’ 노릇을 할 뿐이던 시선이 독일과 말레이 혼혈인 화가 요제프 리와 어울리며 개인전을 여는 등 독립할 기미를 보이자 마티아스는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질투와 배신감을 표출한다. 그런 마티아스로부터 벗어나 한국으로 온 시선과 요제프 사이에서 난 명혜와 명은, 명준 세 남매, 그리고 시선의 두 번째 남편인 홍낙환이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경아까지 네 자식과 그들의 배우자 및 자식 들이 제사를 위해 하와이를 찾은 것.

소설은 모두 31개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장마다 앞머리에 시선 자신의 책이나 방송 인터뷰 등에서 뽑아낸 대목들을 통해 그의 삶과 생각을 보여주고, 본문에서는 그 자손들의 현재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장 앞머리에 뽑아놓은 것은 1999년에 ‘21세기를 예상하다’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텔레비전 대담에서 시선이 한 발언이다. 이 대담에서 시선은 제사를 가리켜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 단언한다. 그런 어머니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장녀 명혜가 시선의 10주기에 새삼 그동안 안 하던 제사를 올리겠다고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실 시선의 주검은 화장한 뒤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기 때문에 무덤은커녕 유골함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엄마의 10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기념하고 싶었던 명혜는 ‘제사’를 핑계 대고 시선의 흔적을 좇아 식구들을 이끌고 하와이로 간다. 그가 생각하는 제사는 이러하다. 우선 가족들은 기일보다 며칠 앞서 하와이에 도착해 각자의 방식으로 할머니를 생각하며 하와이를 여행한다.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제사상에 오르는 제물은 이동식 조리대에서 바로 구운 팬케이크, 아직 뜨거운 말라사다 도너츠, 재생 플라스틱 블록 탑, 레후아꽃과 화산석 자갈, 레이 목걸이, 새 깃털, 서핑하면서 채집한 파도 거품, 커피, 무지개 사진, 훌라춤 등으로 이채롭고 다양하다. 장례와 제사에 일종의 축제적 성격이 깃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겠는데, 이 소설의 경우에는 그런 축제 또는 파티의 성격이 한결 진하다. 풍광 좋은 여행지가 배경인데다, 죽음과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삶의 기쁨을 구가하는 것이 이 제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분위기가 마냥 가볍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선의 자손들이 맘에 드는 제물을 고르기 위해 하와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동안 그들의 현재 삶을 짓누르고 있는 아픔과 고민이 차례로 드러난다. 명혜의 큰딸 화수는 그가 다니던 회사의 협력업체 사장이 병에 담아 던진 염산 파편을 얼굴에 맞아 몸과 마음에 두루 깊은 상처를 입었다. 경아의 고교생 아들 규림은 남자 동창 도영이 여자 사람 친구 한빛을 상대로 에스엔에스에서 성폭력을 가할 때 “멍청하고 멍하게 방조하고 있었”던 일을 두고 괴로워한다. 새를 좋아하는 그의 여동생 해림은 “무용해 보이는 과열 경쟁의 경로에서 벗어나 새를 많이 보고 새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택하는 게, 가능할까” 고민 중이고, 미국에서 영화 특수효과 관련 일을 하는 명준의 딸 우윤은 한국으로 돌아올까 하는 고민을 곱씹고 있다.

장편소설 &lt;시선으로부터,&gt;의 작가 정세랑. &lt;한겨레&gt; 자료사진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작가 정세랑. <한겨레> 자료사진

자손들의 이런 상처와 고민은 시선 자신이 감당했던 상처 및 고민의 연장이요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미술평론에서 시작해 자신의 삶의 조각들을 쓴 책들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문화계 명사가 된 시선은 당시로서는 도발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글과 말로 풀어냈다. 화수가 생각하기에 “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고)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선의 이런 면모는 그의 자손들, 특히 딸과 손녀딸 등 모계로 이어져 내려온다. 큰딸 명혜는 “우리집은 모계 사회니까 내가 제일 어른”이라 주장하고, 명혜보다 세 살 위인 남편 태호는 그 말에 동의하며 자신이 “장모로부터 뻗어나온 기세 좋은 여자들에게 감탄하며 살았다”고 회고한다. 소설 제목 ‘시선으로부터,’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시선이 자손들에게 남긴 이런 유전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소설 마지막 단락에서 그 유전자는 이렇게 힘차고 아름다운 표현을 얻는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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