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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억압 배신 복수…위기의 여성들

등록 2006-01-12 18:45수정 2006-01-13 16:49

표명희 소설 <3번 출구>
표명희 소설 <3번 출구>
2001년 <창작과 비평> 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표명희(41)씨가 첫 소설집 <3번 출구>(창비)를 묶어 냈다.

책에 수록된 여덟 단편에서 작가는 다양한 직종과 상황의 인물을 등장시켜 욕망과 상처가 어우러지는 만화경을 제시한다. 특히 여성 주인공들이 겪는 억압과 그로부터의 탈출 욕망을 다룬 작품이 여럿 실렸다.

<탑소호족 N>에서 주인공인 ‘N’은 주택 분양 사기에 걸려 애써 모은 전세금을 날리고 허름한 옥탑방에 둥지를 튼 외화 번역가다. 그가 처한 가난과 곤경은 얇은 베니어합판 너머로 너무도 또렷하게 들려 오는 옆집 사람들의 생활 소음, 그리고 무엇보다 기관지가 부실한 그 집 안주인의 끔찍한 기침 소리로써 상징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은 “잘못하다간 평생 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을 더 많이 하면서 확실하게 옥탑방을 벗어날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그런 계획과 아울러, 아침부터 벼르던 꽃게탕이 그제서야 보글거리는 저녁녘 ‘N’의 부엌 풍경은 다소간의 희망의 냄새를 풍기지만, 어쩐지 그 희망을 확실하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듯한 느낌이다.

함께 수록된 다른 작품들의 결말은 한층 답답하고 어둡다. 작가의 등단작인 <야경>은 갑자기 쓰러진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병 수발 드는 것으로 주저앉은 젊은 여성을 주인공 삼는다. 일찌감치 혼자가 된 뒤 쓰러지기 직전까지 여러 남자를 바꿔 가며 젊음과 건강을 즐겼던 엄마에 대해 주인공은 당연히 애증이 복합된 심리상태를 지닌다. 그의 유일한 출구는 스스로 ‘밤 외출’이라 일컫는 실내수영장 나들이뿐이다. 수영장에서만큼은 어머니의 욕창과 반지하 방의 곰팡이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탈은 그야말로 잠깐일 뿐, 소설의 말미에서 외출이 끝난 뒤의 그는 하릴없이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학벌도 외모도 보잘것없는 주인공이 일과 사랑에서 한꺼번에 배신을 맛본 끝에 성형수술을 받고서 착란 증세를 보이는 과정을 그린 표제작, 초현대식 건물의 안내원이 목격하는 음모와 비정, 욕망과 복수의 현대적 풍속도를 조감한 <누드 에스컬레이터>, 한미한 집안 출신인데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노골적으로 구박하는 시어머니에게 은밀한 복수를 꿈꾸고 또 실행에 옮기는 며느리를 등장시킨 <실리카겔>의 결말은 한결같이 위태롭고 막막하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온이>와 <죽령터널, 지나다>는 이채롭다. <온이>의 화자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동생을 둔 초등학생 ‘진이’인데, 그 아이는 상장이란 상장은 휩쓸다시피 타 오는 자기보다 바보 같은 말썽꾸러기 동생 온이를 더 감싸고 도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너무도 번듯한 이 세상이 정말 숨막혀요”라는 어머니와 “당신은 뭔가에 비틀려 있어”라 응수하는 아버지가 맞서는 가운데 진이는 고민에 빠진다. 온이를 보육원에 맡길 것이냐, 집에 데려와 함께 살 것이냐. 일종의 ‘믿을 수 없는 화자’인 진이는 소설이 끝나도록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지만, 진이보다 현명한 독자인 우리는 그 아이가 온이에 대한 애초의 편견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는 것을 안다.

<죽령터널, 지나다>는 수록작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결말을 지니고 있다. 죽은 남편의 정부였던 것으로 의심되는 친구를 찾아 시외버스에 오른 주인공이 로커 출신의 젊고 매력적인 운전기사를 만나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상실과 배신의 묵은 상처를 벗어 버리게 된다는 소설의 결말은 소설집 속에서 튀어 보일 정도로 이질적이며 그만큼 생경하게 다가온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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