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코로나19로 숨진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마지막 장편소설 <역사의 끝까지>(2016)가 번역 출간되었다. 세풀베다는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시절 숱한 이들을 불법 구금하고 고문했던 수용소 비야 그리말디의 희생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헌사에 썼다. 사진은 지난 2005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해 <한겨레> 주최로 대담을 하는 세풀베다의 모습이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지난 4월, 스페인 북부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세상을 떴다. 이 바이러스의 희생자 가운데에서는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가장 높은 작가였다.
새로 번역 출간된 <역사의 끝까지>는 2016년작으로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유작으로는 지난해 5월에 발표한 <흰 고래 이야기>가 있는데, 인간에게 살해당한 동료의 복수를 위해 인간을 공격하는 고래의 이야기를 고래 자신의 입으로 들려주는 이 작품은 일종의 ‘어른을 위한 동화’라 할 수 있다.
<역사의 끝까지>는 칠레의 아픈 현대사와 그와 결부된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에 깐 작품이다.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전후한 칠레의 현대사는 그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의 문학은 그 그림자와 싸우거나 화해하기 위한 여정과도 같았다. 쿠데타로 숨진 아옌데 대통령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세풀베다는 쿠데타 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유럽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출세작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비롯해 <귀향> <우리였던 그림자> 같은 작품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재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가치를 선양했다.
<역사의 끝까지>에서 세풀베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 후안 벨몬테를 내세워 미해결된 역사적 채무의 정산을 시도한다. 아옌데 대통령의 호위대 대원을 지냈고 볼리비아와 니카라과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던 왕년의 혁명가 벨몬테는 이제 게릴라 조직을 떠나 혁명 동지이자 연인인 베로니카와 함께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협박에 가까운 제안이 들어온다. 이 소설의 전작(前作)에 해당하는 <귀향>(1994)에서 벨몬테와 엮인 바 있던 옛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출신 노인 크라머가 러시아 정보 당국을 대신해 건넨 제안으로, 벨몬테의 옛 동료들인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를 찾아내라는 것. 이 두사람은 피노체트 당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다가 감옥에 수감돼 있는 카자흐 혈통 장군 미겔 크라스노프를 구출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 역시 칠레의 혁명가 출신인 이 두사람과 벨몬테는 1970년대 후반 옛 소련 비밀경찰 케이지비(KGB) 요원들에게 함께 교육을 받은 인연이 있고, 벨몬테는 당시 소련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로 꼽히는 바실리 자이체프(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주인공)에 필적할 백발백중의 저격수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칠레의 현대사가 주요 배경이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소련 내 카자흐족이 2차대전 무렵 독립국가 건설의 꿈을 품고 나치에 협력했다가 종전 뒤 몰락하고 고초를 겪었던 역사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고문기술자 크라스노프를 구출하려는 음모 역시 러시아 내의 극렬 카자흐 분리주의자들이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옹립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는 아내와 자식, 동생 등이 크라스노프의 악랄한 고문에 희생된 아픔을 지니고 있고, 벨몬테의 연인 베로니카 역시 크라스노프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죽음 직전에야 풀려났으며 그 후유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런 그들이 크라스노프를 구출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소설은 추리적 기법과 누아르적 전개로 흥미를 더하면서 감추어진 진실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사라진 퍼즐조각”이 마침내 맞추어지고 “해묵은 문제”가 해결되는 결말에 이르면 ‘역사의 끝까지’라는 소설 제목이 지니는 의미를 새삼 곱씹게 된다.
“그들은 혁명가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군사 독재 종식 후 등장한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와 그 경제 모델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모처’에 소속된 레닌 과르디아는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는 추악한 일을 전담했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에르만 브라디 장군은 피노체트의 심복으로 수많은 보안 기관을 창설한 장본인이었다. (…) 그런 자들 때문에 과거 우리의 그림자가 더럽혀지고 말았다.”
지난 4월 코로나19로 숨진 칠레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역사의 끝까지>(2016)가 최근 번역 출간되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소설의 핵심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처’라는 비밀 조직의 존재에 관한 이런 언급은 흥미롭다. 쿠데타 주역이었던 피노체트가 20년 가까이 권좌에 머무르다 물러난 뒤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전향자들을 포섭해 혁명을 퇴색시키고 그 그림자를 지우는 일에 매진한다. 세풀베다의 앞선 소설 가운데 <우리였던 그림자>도 있거니와, 이번 소설에도 그림자는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등장한다. “과거에 우리가 했던 것, 그리고 과거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저주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닌다”, “과거 우리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지워 없앨 수 있지만, 그림자만큼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대목을 보면 그림자는 벨몬테의 분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본질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런가 하면 과거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이던 술집에 이제 “히피들은 보이지 않았고 테이블 위에는 사르트르나 프란츠 파농의 책도 없었다”는 관찰, 그리고 “도덕이나 윤리 따윈 베를린 장벽과 함께 무너져 버렸”으며 “요즘 세상에 삶의 이유가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돈밖에 없”다는 등장인물들의 발언은 속화된 세태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을 담고 있다.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는 “역사의 끝까지” 갈 생각이었고 벨몬테도 그에 동조했지만, 상황이 그들의 뜻대로 풀리지만은 않았다. 소설의 결론을 두고 아쉬워하는 독자도 있을 듯한데, 모든 상황이 끝난 뒤 벨몬테와 베로니카가 집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세풀베다가 염원하는 평화와 회복의 메시지로 읽힌다.
“대지는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처 입은 도시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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