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은닉 대본
제임스 C. 스콧 지음, 전상인 옮김/후마니타스·2만5000원
권력자들이 들으면 크게 웃었다가 돌아서서 섬찟해할 이야기들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속담들. “지체 높은 귀족이 지나갈 때 현명한 농부는 고개 숙여 절한 다음, 소리 없이 방귀를 뀐다.”(에티오피아 속담) “현명한 사람을 잡으려면 바보처럼 굴어야 한다.”(자메이카 노예들의 속담) “통치자 앞에서는 기탄없이 말씀드리기가 두렵습니다.”(에우리피데스, <박코스 여신도들> 가운데)
권력과 지배 그리고 저항의 문제를 규명한 학술서다. 체제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힘 없는 사람들의 거센 저항이라기보다는 지배자의 등잔 밑에서 벌이는 피지배자들의 은근하고 끈질긴 위반과 선 넘기, 그리고 일상의 희비극적 장면에 강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미시정치와 거시정치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상에서 쌓아올린 “수천만개의 쓰라린 농담, 분노 그리고 분개의 핵심”이 엄청난 분노와 힘의 언설을 만나는 “광기의 순간”, “저항의 눈사태”가 벌어진다. 사진은 2018년 5월26일(현지시각)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 국민투표 결과가 찬성으로 발표되자,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손을 들고 환영하는 모습. 더블린/AFP 연합
제임스 C. 스코트 예일대 교수는 권력, 계급, 저항에 많은 관심을 쏟아온 미국의 정치학자로 <국가처럼 보기>(1998, 한국어판 2010)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2009, 2015) 등의 저술이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다. 계량화한 분석을 지양하고 농민 등 약자의 목소리와 서사에 집중해온 그의 관심은 이번에 옮겨 나온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은닉 대본>에서도 확인된다. 피지배자들의 말, 몸짓, 침묵 같은 비/언어적 활동을 분석하는 데 책의 상당 분량을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내뱉는 언설(discourse)에는 권력관계가 숨어 있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과장하거나 숨기면서 연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노동자, 임차인, 지주, 노예, 불가촉 천민 같은 피지배자는 특히 그렇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들 사이의 공개된 상호작용”을 지은이는 ‘공개 대본’ ‘공식 대본’(public transcript)이라고 부른다. 반면 권력자의 시선을 피해 피지배자들이 막후에서 펼치는 언어, 몸짓, 관행은 ‘은닉 대본’(hidden transcript)이다. 은닉 대본과 공개 대본의 불일치에서 지배와 권력, 그리고 저항이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피지배자들의 순응과 침묵은 많은 뜻을 담고 있다. 권력자의 시선을 피해 막후에서 벌이는 언어, 몸짓, 관행은 ‘은닉 대본’에 해당한다. 사진은 <레미제라블>(2012) 한 장면. UPI 코리아 제공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요약하면, 지은이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비판적 견해를 취한다. 피지배자들을 자연스럽게 굴복시키고 순종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포섭이 사회적 갈등을 줄인다는 헤게모니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헤게모니 명제의 문제점은 도대체 어떻게 사회변동이 밑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917년 볼셰비키 혁명, 1960년대 미국 흑인 사회 민권운동, 1970년 폴란드 발트해 연안 도시들에서 발생한 노동자계급 폭동 및 시위 같은 저항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피지배 집단 안에서 작고 점잖게 시작한 최소한의 요구는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복종을 은폐하려는 피지배자의 노래, 몸짓, 농담, 풍자극, 카니발 등을 설명하면서 지은이는 ‘하부정치’(infrapolitics)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이 정치는 주로 은밀하게 대화로 퍼져나가며 증거를 남기지 않아 저항적 발화의 주체를 특정할 수 없게 한다. 하부정치는 “폭정과 박해 하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적 삶”인 것이다. 계급적 지위 때문에 일상적인 치욕을 당한 사람,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사람, 존엄을 부정당한 이들은 그러나 힘을 모아 ‘정의의 언설’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술적이고 안전하게, 그리고 섬세하고 정교하게 은닉 대본이 다듬어진다. 욕인지, 칭찬인지, 저항인지, 복종인지 모를 언설들이 차차 쌓인다. 그렇게 형성된 집단적 은닉 대본은 발화점을 만나면 폭발적인 반란 행위로 연결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917년 볼셰비키 혁명, 1960년대 미국 흑인 사회 민권운동, 1970년 폴란드 발트해 연안 도시들에서 발생한 노동자계급 폭동 및 시위 같은 저항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피지배 집단 안에서 작고 점잖게 시작한 최소한의 요구는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루브르 박물관 소장. 1830년 제작.
결정적인 순간은 그런 은닉 대본이 처음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국면에 온다. 일상에서 쌓아올린 “수천만개의 쓰라린 농담, 분노 그리고 분개의 핵심”이 엄청난 분노와 힘의 언설을 만날 때다. 소곤거리며 말하고 참고 억눌러야 했던 이야기들이 바깥으로 흘러 넘치게 되어 함께 고함치는 공개적인 말로 바뀐다. 은닉 대본과 공개 대본의 경계가 사라지는 “광기의 순간”, “사회적 폭발”과 “저항의 눈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안티고네 같은 고전이나 제3세계의 속담 같은 이야기를 동원해 작가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인류학자로서의 탐구심도 잃지 않는다. 거대한 이데올로기 정치 분석에서 뒤로 밀려나 있었던 개인의 미시 정치를 중요하게 취급해 바닥에 깔린 인간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이는 가히 문학적 비평 작업을 방불케 한다. 딱 잘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굴욕과 멸시, 긴장, 그리고 저항의 정치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뿐 아니라 일상적인 인간관계 저변에 폭넓게 자리한 것이다. 인간의 말과 권력에 대한 분석은 결국 일상의 정치적인 관계를 폭로하는 것이니, 이 책 어디를 펴더라도 금세 자신의 처지나 주변의 특정인을 떠올리며 ‘아하!’ 깨달음을 얻게 될 터다.
1990년 미국에서 처음 발간되어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오늘날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에까지 함의하는 바가 크다. 옮긴이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후기에서 “스콧의 권력 이론 혹은 저항 이론은 지배 관계가 성립된 곳이라면 어디든 적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원제(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 Hidden Transcripts)에서 ‘art’를 ‘기예’ ‘기술’이 아닌 ‘예술’로 옮긴 이유를 묻자 전 교수는 “은닉 대본에 기술적 측면보다 문화적 차원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흔히 ‘담론’ ‘담화’ 등으로 쓰는 ‘discourse’를 ‘언설’이라 옮긴 것과 관련해서는 “말의 형식이나 내용을 ‘세팅한다/설정한다’는 점에서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섬세한 각주와 후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찾아보기 또한 책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인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