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백온유 지음/창비·1만3000원
우연한 사고였다. 예정과 원, 두 자매만 있던 아파트에 불이 났다. 12층 할아버지가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가 11층 자매의 집 베란다로 떨어졌고,
타다 만 담배꽁초가 책과 신문으로 옮겨붙어 이내 큰 불로 번졌던 것이다. 불과 연기로 뒤덮인 순간, 언니는 동생을 젖은 이불에 둘둘 말아 창밖으로 던졌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아이를 온몸으로 받았고
물리적 충격으로 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됐다.
예정은 죽고
원만 살았다. 언론의 대서특필로 원은 전 국민이 아는 ‘은정동 화재 사건 생존자’, ‘11층 이불 아기’가 됐다.
12년 전 참사에서 살아남은 원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유원>은 화재 사고로 언니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18살 유원의 아픔과 성장을 그린 청소년 소설이다. 지난해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으며 출품 당시 제목은 ‘날개가 피어나는 날’이었다. 장편동화 <정교>로 2017년 제24회 엠비시(MBC) 창작동화대상을 수상한 작가 백온유(사진)의 두 번째 작품이다.
주인공 유원은 착한 언니의 몫까지 두 배로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아침에 “미안해하며 눈을 떠야” 하는 그는 자신을 구하다 다친 아저씨를 보며 미안함과 죄책감을 안고 산다. “나는 어쩌면 고소공포증을 느끼기에 타당한 사람.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 아저씨 뒤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살펴야 했던 사람.”
원은 자신을 구한 아저씨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다. 아저씨의 아픈 다리를 보면 가슴이 저며오지만 사고 뒤 아무 때나 집에 찾아오고 부모님에게 돈을 요구하는 그를 “죽이고 싶”다.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그는 “나는 왜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대상에게 사나운 마음을 갖는지” 괴로워한다. 그를 가장 짓누르는 것은 죄책감이다. 그건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문제가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그뿐인가. 원치 않게 유명인이 된 원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받고 그 시선에 곧잘 베인다. 원은 “상당히 많은 애들이 내게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살아남은 그를 위로하고 축복하면서도, 그가 웃고 떠들 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원은 자신이 나온 12년 전 기사에 여전히 달리는 익명의 폭력적인 댓글에도 생채기가 난다. 가까이 있는 이들은 그의 모습에서 언니 예정을 찾는다. 원은 자신이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가 된 것 같다.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감정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원은 어느 날 우연히 옥상에서 같은 학년의 수현을 만난다. 원은 너무나 다른 수현에 끌린다. 수현은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공부보다는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수현 역시도 아픈 사연을 간직한 인물이다. 수현에 대한 비밀은 소설의 중간 지점에서 밝혀진다.
성장은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 상처를 안고 있는 원과 수현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흔들릴 때마다 기댄다. 그들은 상처를 딛고 용기를 내 일어서도록 돕고 나를 찾아가는 그 길에 함께 서주는 친구가 된다. 특히 모든 옥상 문을 여는 수현의 마스터키는 상처로 웅크린 원이 내면의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달라진 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 있다. 원은 다큐멘터리 방송 출연을 강권하는 아저씨의 제안을 거절하며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생명의 은인인 아저씨에게 ‘나’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드러낸 것이다.
소설은 예전 화재 사고를 빼고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다. 대신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간다. 인물들이 평면적이지 않다. 예컨대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느끼지 못하는 아저씨는 한편으론 비가 오는 날 원이 걱정돼 하나뿐인 우산을 건네고 “널 받았을 때 그리 무겁지 않았다”며 원의 죄책감을 달래주는 말을 한다. 아저씨의 무리한 요구를 불평 없이 다 들어주는 원의 엄마는 딸을 구한 사람에 대한 고마움만 갖고 살지 않는다. 기사 식당을 운영하는 그는 트럭 운전을 했던 아저씨처럼 고단한 사람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는 인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원은 수현의 도움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한다. 작위적인 설정으로 느껴지지만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는 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제격이다. 그건 ‘이불 아기’도 ‘생존자 유원’도 아닌, 그냥 18살 유원으로 펼친 첫 날갯짓이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옥상에서 아래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단순하게 불안함과 공포라고 여겼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건 잠재의식 속에 사고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걸 좋아하는구나.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설렘과 기대감, 혹은 전율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280쪽이 한번에 가볍게 읽힐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데, 책을 덮고 남은 여운은 묵직하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아이 원을 보면, 우리가 아프게 지나온 현실의 참사
안에서 여전히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들 옆에 선 우리의 무심한 얼굴을 서늘하게 마주보도록 한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창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