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코 자서전: 지성사의 숨은 거인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교유서가·1만8000원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는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후 인문학 분야에서 이탈리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로 꼽힐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최근까지도 비코의 사상은 역사학자들의 저서나 서양사 개론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데 그쳤다. 지난해 비코의 주저 <새로운 학문>이 서양사학자 조한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의 성실한 번역으로 한국어본을 얻게 됨으로써 국내에서도 비코 연구의 토대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번역자가 옮긴 <비코 자서전>은 이 ‘지성사의 숨은 거인’의 삶을 비코 자신의 목소리로 안내하는 책이다.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기까지 비코의 지적 행로를 그리고 있어 비코 사상의 형성 과정을 비코에게서 직접 듣는 기회를 제공한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을 처음 펴낸 것은 1725년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비코의 이름은 오랫동안 서양사상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망각 속에 묻힌 비코를 되살려낸 사람은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였다. 미슐레는 <새로운 학문>이 세상에 나온 지 거의 100년이 된 1824년 그 책을 발견하고 ‘비코의 위대한 역사 원리’에 충격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비코 이외의 스승이 없다.” 미슐레는 연구에 매진해 비코에게서 민중을 역사의 중심에 둔 진보적인 학자의 상을 찾아냈다. 다시 1세기 뒤 비코의 고향 나폴리 출신의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는 <비코의 철학>(1910)을 저술해 선배 철학자의 삶을 기림으로써 비코가 역사학의 전면에 등장하는 데 기여했다. 또 마르크스주의 진영 안팎에선 카를 마르크스가 비코의 사상에 관심을 보인 데서 자극받아 비코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비교하는 연구도 활발해졌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비코의 독특한 역사관은 20세기 역사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의 순환사관으로도 이어졌다.
<비코 자서전>은 비코가 <새로운 학문>을 출간한 뒤 베네치아 유력 귀족에게서 자서전 집필을 권유받아 쓴 것이다. 그 귀족은 당대의 명망 있는 나폴리 학자 8명에게 ‘학업 과정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학문적 삶을 기술한 책을 쓰게 했는데, 비코는 몇 번의 사양 끝에 집필 권유를 받아들였다. 특이한 것은 이 책이 자서전인데도 비코가 제3자의 삶을 기술하듯 자신을 ‘비코’라고 부르며 객관적 시점에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자서전은 “잠바티스타 비코는 나폴리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던 선량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첫 문장의 분위기와는 달리 비코의 일생은 불운이 할퀸 상처가 가시지 않는 삶이었다. 한국어판 <비코 자서전>에는 비코가 24살 무렵에 쓴 시 ‘절망한 자의 사랑’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쓰라린 고통’과 ‘비정한 슬픔’으로 점철된 이 장문의 시는 비코의 삶을 요약하는 듯이 보인다. 비코의 첫 번째 불운은 일곱 살 때 닥쳤다. 비코의 아버지는 나폴리에서 서점을 운영했다. 책을 좋아하던 어린 비코는 서가에 있는 책을 꺼내려고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가 거꾸로 떨어져 두개골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다. 실신한 비코는 다섯 시간 만에 깨어났으나 사고의 후유증으로 “점점 우울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비코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홀로 공부하면서 학문의 기초 과정을 마쳤다. 이런 이력 때문에 훗날 비코는 ‘스스로를 가르친 사람’(autodidascalo)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20대가 끝날 무렵까지 이 ‘독학자’는 수많은 학문을 섭렵했는데,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자·역사가·시인에서부터 비코 당대의 학자 스피노자와 푸펜도르프까지 무수한 이름이 등장한다. 비코의 공부 영역도 넓어서 형이상학을 비롯해 역사학·기하학·자연학·법학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했다. 이런 공부 덕에 비코는 1699년 나폴리대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채용됐다. 비코의 삶에서 보기 드문 행운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렇게 빽빽한 지식의 숲을 가로지르는 동안 젊은 비코에게 두 사람이 학문의 안내자로 떠올랐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였다. “플라톤이 보편적 지식을 통해 이데아를 아는 인간의 덕성을 널리 알렸듯, 타키투스는 행운과 악운의 무한히 불규칙적인 사건들 속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인간이 줄 수 있는 혜택을 조언했다.” 플라톤의 철학과 타키투스의 역사학의 결합 속에서 훗날 비코의 독창적인 역사철학이 태어났다.
1723년 비코는 나폴리대학 법학 교수 자리가 비자 공모에 응했지만 탈락하고 말았다. 법학 교수 자리는 수사학 교수보다 여섯 배나 많은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 사건은 비코에게 어린 시절의 추락에 버금가는 삶의 추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비코는 학문의 길을 멈추지 않고, 이 불운을 또 다른 도약의 동력으로 삼았다. 마침내 2년 뒤에 필생의 대작 <새로운 학문>이 결실을 보았다.
<새로운 학문>의 원제는 ‘여러 민족의 공통적인 본성에 관한 새로운 학문의 원리’다. 여기서 비코는 ‘인간은 인간이 만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명제를 제1원리로 제시했다. 이것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이 자연 세계에 탐구의 초점을 맞추는 데 대한 비판을 내장하고 있다. 자연 세계는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신만이 궁극적인 원리를 알 수 있는데, 그 세계를 탐구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다는 얘기다. 반면에 비코는 인간의 사회와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인간의 지성으로 그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원칙에 입각해 역사를 탐구해 들어간 비코는 “인간사의 영원한 속성에 따라서 모든 민족은 흥기하고 정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겪어간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순환론적 역사관이 탄생한 것이다. 비코는 이 역사의 전개와 순환에 민중의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은근히 강조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