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백수린(
사진)의 세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는 지난해 현대문학상 수상작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비롯해 여덟 단편이 묶였다. 외국을 무대로 삼고 외국인을 등장시키는 특징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국내에서의 계급 격차로 변형되는 양상이 흥미롭다. 뒤늦은 후회와 자책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여럿 나오며, 엄마와 할머니 등 여성 인물의 욕망에 대한 긍정과 예찬이 새로운 줄기를 이룬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선배 작가 오정희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과 파국의 분위기가 일품이다.
“아이가 원하면 언제고 풀어헤쳐 꺼내놓는 그녀의 젖가슴, 유두가 헐고, 갑자기 팽창했다가 쭈그러든 후 다시 팽창하기를 반복해 살이 트고 처진 그녀의 젖가슴 안쪽 무언가를 마치 꿰뚫어보듯.”
주인공인 ‘그녀’가 주택 해체 공사 현장에서 탄탄한 근육을 지닌 젊은 중국인 인부와 맞닥뜨렸을 때 받은 느낌이다. 이 순간 주인공은 얼마 전 초대돼 간 파티에서 자신의 몸매를 칭찬했던 남자 무용수를 동시에 떠올리는데, “그녀의 젖가슴 안쪽 무언가”가 애써 감추고 눌러 놓았던 성적 충동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체 공사가 끝난 뒤 그가 그 일에 관해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장면, 그리고 “한나절 만에 조숙해진 둘째 아이만이 엄마의 평상시와 다른 아름다움이 낯설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는 마지막 문장은 파국의 조짐으로 팽만하다.
“사랑에 빠져버린 그 여자의 얼굴이 실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서 말했더라면.”
‘폭설’의 주인공인 딸은 어릴 적 다른 남자를 사랑해서 가족을 떠난 엄마를 원망하며 성장했다. 인용한 대목은 어른이 된 그가 미국에 사는 엄마를 만나 한바탕 비난의 말을 퍼붓고 난 뒤에 느끼는 회한과 후회의 심정을 담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관찰은 ‘흑설탕 캔디’에도 나온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서 지내던 시절, 어린 ‘나’와 남동생을 돌보느라 함께 프랑스에 와 있던 할머니는 이웃집 프랑스 할아버지와 호감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데,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그즈음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독일인 노부부와 한국의 젊은 부부의 우정을 다룬 표제작이 식민과 피식민,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드러낸다면, ‘고요한 사건’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같은 동네 아이들 사이의 “생활의 격차”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등단 10년차 백수린 소설의 변모와 심화를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