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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서울에서 원산까지…책으로 떠나는 경원선 피서 여행

등록 2020-07-31 05:00수정 2020-07-31 10:09

방민호 교수, 경원선 35개 역 다룬 옛 산문들 책으로 엮어

경원선 따라 산문여행
방민호 엮음/예옥·2만5000원

“경원선에선 이곳을 지날 때가 가장 유쾌하다. 돌돌 구르고 샘이 솟아오르며 흰 거품을 내뿜고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이 산협의 물줄기, 각양각색의 고산식물이 한데 엉켜 깊은 총림(叢林)의 느낌이 있는 산, (…)”

월간 잡지 <삼천리> 1940년 4월호에 실린 이은휘의 글 ‘밤차’의 일부다. 경원선 열차 구간 중 한곳을 묘사한 대목인데, 여기서 말하는 ‘이곳’이란 삼방협. 지금은 강원도 세포군에 속하지만 해방 전에는 함경남도 안변군 소속이었다. 협곡과 약수, 폭포가 유명해서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이들이 경성(서울)에서부터 열차 편으로 피서를 다녀온 명소였다.

경원선은 경성에서 동해안 원산에 이르는 226.9㎞의 철도 노선(1941년 현재). 191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일부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1914년에 전 구간이 뚫렸다. 그러나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분단과 전쟁으로 노선 역시 반토막이 났다. 지금은 철도 중단점을 알리는 신탄리 역의 입간판 ‘철마는 달리고 싶다’가 경원선과 겨레의 불구적 현실을 호소할 뿐이다.

분단으로 끊긴 서울-원산 사이 경원선 철도의 35개 역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에 쓰인 기행문들을 모은 책 &lt;경원선 따라 산문여행&gt;이 출간되었다. 사진은 2014년 7월 ‘경원선 DMZ 트레인’의 본격적인 운행을 앞두고 개통식에 참석한 이산가족 100여명이 열차를 타고 한탄강 인근을 지나고 있는 모습. 연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분단으로 끊긴 서울-원산 사이 경원선 철도의 35개 역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에 쓰인 기행문들을 모은 책 <경원선 따라 산문여행>이 출간되었다. 사진은 2014년 7월 ‘경원선 DMZ 트레인’의 본격적인 운행을 앞두고 개통식에 참석한 이산가족 100여명이 열차를 타고 한탄강 인근을 지나고 있는 모습. 연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경원선 완주를 책으로 대신해 보면 어떨까. <경원선 따라 산문여행>은 ‘서울에서 원산까지’(부제) 경원선 전 구간을 자유롭게 오갔던 일제 강점기 문인들이 쓴 여행기와 신문·잡지 기사를 모은 책이다. 앞서 인용한 ‘밤차’를 비롯해 경원선 35개 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서울에서 원산까지 순서대로 엮었다. 국문학자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개벽> <삼천리> <동광> 같은 잡지들을 뒤져 수집한 글을 통해 상상 속에서나마 경원선 여정을 만끽할 수 있다. 이광수·한용운·염상섭·임화·채만식 등 잘 알려진 문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글을 만나는 즐거움은 덤이다.

경성역을 출발한 열차는 용산·서빙고·왕십리 등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데, 청량리역을 당시에는 ‘동경성역’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동아일보> 1939년 12월22일 치 기사는 함경도 이원에서 노동하던 박성팔이라는 이가 천연두에 걸려 고향인 경남 함양으로 가고자 경원선 열차를 타고 오던 중 적발되어 열차가 동경성역에 도착하자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동시에 의사와 본정서원이 출동하여 환자가 타고 온 기차 승객 250명에 강제 종두를 시키는 동시에 열차도 전부 소독하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 상황에서 특히 와닿는 내용이다.

창동과 의정부를 지나 동두천역에 하차한 여행객은 “촌가의 마당에 벼와 기장이 만장함을 보고 저 맑은 언덕의 누런 풀이 가을바람에 언앙(偃仰, 누웠다 일어났다)함을 볼 때 자유의 낙원이 이곳임을 다시금” 느낀다(박춘파, ‘청추(淸秋)의 소요산, <개벽> 1920년 11월). 전곡·연천·신탄리를 지나 철원에서는 금강산 전철을 바꿔 탈 수 있었다. <동아일보> 1937년 8월26일 치에 실린 글 ‘철원 지나 금강산으로’(김호직)에 따르면 청량리역에서 오전 8시23분에 열차에 오른 필자는 11시20분 철원에서 금강산 전철로 갈아탔으며 김화·탄감·화계를 지나 해발 648미터 단발령에 놓인 총 길이 1천여 미터의 터널을 통과해 내금강역에는 오후 세 시에 도착한다.

철원은 후고구려로도 불린 태봉국의 지도자 궁예의 유적으로도 유명하다. 경원선으로 철원에 도착한 문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궁예와 태봉국의 유적을 찾아 비감 어린 기행문을 남긴다. <개벽> <별건곤> 등 잡지의 주간 및 기자로 활약한 차상찬이 <개벽> 1924년 12월호에 실은 기행문 ‘북국 천리행’이 대표적이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볕은 금학산으로 날아드는 까마귀 등에 번뜩이고 쓸쓸히 부는 가을바람은 궁예성의 거친 풀을 나부끼는데 만산의 풍엽, 편야의 황도(들에 가득 찬 누런 벼), 모든 것이 다 태봉국의 옛 근심을 새로 자아낸다.” 궁예와 태봉국에 투사한 망국의 한에서 당시 문사들의 나라 잃은 설움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어디메꺼지 가우?” “서울꺼정 간당이.” “아이 세상에 멀리 가우다나. 난 철원까지 간다우다. 우리 딸이 요좀에 뭄 푸렀시요.” “앙이 무시기 낳소?” “아들이 앵이요. 발세 둘채라우.”

앞서 인용한 글 ‘밤차’의 필자는 원산에서 서울을 향하는 열차에 타고 있는데, 그와 동승한 초면의 두 아낙이 주고받는 대화는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아득한 북방 정서를 자극한다. 경성에서 출발한 열차가 삼방협역과 삼방역을 잇따라 지나면 그 다음이 민요 ‘신고산타령’의 무대인 고산역. 경성에서 오전 8시 열차를 타면 고산에는 오후 1시에 도착한다. 고산 다음은 용지원이고 그 다음이 삼방협, 원산 해수욕장과 함께 경원선의 3대 피서지로 꼽히던 석왕사 입구인 석왕사역이다. <동아일보> 1926년 9월1일~13일 치에 연재된 ‘석왕사 가는 길’(C. K. 생)은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길이도 가장 길고 완성도도 높다. 이 글의 필자는 남편과 함께 일주일 휴가를 내어 삼방협과 석왕사, 원산 해수욕장을 여행했는데, 그의 글에 묘사된 원산의 모습과 명사십리 풍경은 남쪽 독자의 안타까운 그리움을 자아낸다.

“거진 원형으로 보이는 영흥만의 서쪽 모퉁이 첩첩한 노인치 제봉을 뒤에 두고 신월형(초승달 모양)으로 앉은 것이 원산 시가입니다.” “정말 명사십리라는 곳은 이 뱀장어같이 긴 땅의 동남쪽입니다. 거기 진한 일자로 10리나 되는 긴 해안이 모두 옥가루 같은 백사로 되고 거기는 다북다북 해당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습니다.”

엮은이 방민호 교수는 “한국문학 연구자로서 이광수와 김동인 등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북한 지역으로 관심이 뻗어가게 되었다”며 “경원선과 마찬가지로 분단 이후 가지 못하는 철로가 된 경의선을 다음 작업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분단으로 끊긴 서울-원산 사이 경원선 철도의 35개 역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에 쓰인 기행문들을 모은 책 &lt;경원선 따라 산문여행&gt;이 출간되었다. 사진은 2014년 7월 ‘경원선 DMZ 트레인’의 본격적인 운행을 앞두고 개통식에 참석한 이산가족 100여명이 열차를 타고 백마고지역에 도착하는 모습. 철원/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분단으로 끊긴 서울-원산 사이 경원선 철도의 35개 역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에 쓰인 기행문들을 모은 책 <경원선 따라 산문여행>이 출간되었다. 사진은 2014년 7월 ‘경원선 DMZ 트레인’의 본격적인 운행을 앞두고 개통식에 참석한 이산가족 100여명이 열차를 타고 백마고지역에 도착하는 모습. 철원/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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