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뢰이어의 <정원의 마리>. 1895년.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덴마크의 외딴 해변 마을 스카겐은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여름이면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몰려들었고, 전통적인 바닷가 마을의 거친 자연에 매료됐다. 화가 커플이었던 크뢰이어 부부도 이 곳에 머무르며 숱한 그림을 남겼다. 샘터 제공
화가가 어떻게 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네의 <수련>이 영원을 담고 흐르며, 크뢰이어의 <장미들>에서 흰 장미나무 위로 포말처럼 부서지는 햇볕을 보면 위대한 화가들의 정원에서 잡초라도 뽑아드리고픈 겸허한 마음이 되고 마는 것을. 남의 정원을 훔쳐보는 즐거움을 아는 ‘식덕’(식물 덕후)들에게 <화가들의 정원>은 보물창고 같은 책이다. 화가들의 분방한 일생―그가 어느 사조를 만들었으며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를 흘려읽다가도, 자신의 생태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화가가 마침내 집을 사고 정원을 지어 올리는 순간 영혼이 정원사인 사람들의 눈은 반짝일 것이다.
오렌지 나무와 올리브, 무화과, 라임 나무로 채워진 인상파 화가들의 집에선 빛을 향한 갈망이 읽힌다. 올리브 나무와 대화했다는 세잔, 마로니에 잎이 빛살에 흔들리는 것을 그렸던 르누아르. 모네는 말해 무엇하랴, 그의 정원만 다룬 책이 있을 정도이다. 스페인 화가인 소로야의 정원엔 지중해식 파란 타일 위로 붉은 토분들이 보이고, 그라나다에서 구해온 은매화 생울타리가 둘러져 있다. 달리의 파티오에는 펠라르고늄(제라늄)과 헬리크리섬이 핀다. <잉글리시 가든 매거진>의 편집자였고 조경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는 글쓴이(재키 베넷)의 문장은 간략하지만, 폐허가 된 르누아르의 집에 수국만 흐드러져 있었다는 한토막 언급만으로도 습도가 전해진다.
크뢰이어의 <장미들>. P.S크뢰이어는 스카겐에 머무르면서 아내 마리 크뢰이어를 담은 유명한 <장미들>(1892년)을 그렸다. 앞쪽에 소담스레 핀 꽃은 ‘알바 막시마’(Alba Maxima) 장미다. 샘터 제공
프리다 칼로의 푸른집도 특별했다. 그의 그림 속 “벽을 타고 오르는 부겐빌리아와 시계꽃, 토착식물인 용설란과 선인장, 유카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육신의 감옥에 갇혔던 그가 실제로 쌓아올린 생기로 가득한 공간이었음을 알게 됐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트로츠키를 그가 숨겨줬던 역사를 식물학자라면 한줄로 전할 것이다. “작업실 바깥에 멕시코울타리선인장을 심었더라고.” 유명한 <페르세포네>(로세티)의 모델로, 두 남자의 세계를 지배했던 제인 버든 모리스의 붉은집(켈름스콧 저택)에 초대받는 영광도 누린다. 그의 남편이 디자인계에 한획을 그은 윌리엄 모리스인데, 당연하게도 그의 집에는 아칸투스와 인동덩굴이 자란다. 보면 “아! 이거?” 하고 외칠 눈에 익은 벽지 패턴이다.
역경의 삶을 산 프리다 칼로의 안식처이자,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피난처이기도 했던 코요아칸의 푸른집. 샘터 제공
호넬은 등수국, 단풍, 벚나무, 대나무, 모란, 작약 등 ‘이국적’인(우리에겐 친숙한) 식물 심기에 열중했다. 썩 친근하지 않은 호넬의 그림이지만, 아시아에 흔한 ‘산나리’ 구근을 우편으로 받아봤다니 해외 직배송도 아랑곳하지 않는 ‘식덕’의 마음만은 공감하고 만다. 화가의 이름을 딴 장미, 붓꽃도 있다. 칸딘스키는 화단마다 번호를 매겼고 콩 수확량을 기록할 때 무게가 아닌 수를 세었다는데, 좀 더 경외하는 마음으로 보게 됐다. 다소 낯선 미국 인상주의 화가 마리아 오키 듀잉도 만난다. 남편 토마스 윌머 듀잉이 그려낸 초록빛 안개 속 가녀린 여성들과는 사뭇 달랐다는데, 그녀의 그림 <양귀비 화단>을 보면 필시 거름 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씩씩한 여성이었으리라.
고흐가 해바라기밭 한 평도 갖지 못했듯, 정원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치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나 개인적인 고난을 겪을 때면 화가들은 정원으로 향했”고, 그 속에서 태어난 그림은 평온과 일상에 대한 갈구, 자연에 대한 경외로 차올랐다. 코로나19로 겹겹이 쌓인 시름만큼, 또 어디선가는 꽃이 피어나고 우리는 위로받을 것이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지베르니에 있던 모네의 집 앞 정원 르클로노르망(Le Clos Normand)은 모네를 색채의 대가로 만들었다. 외부에서 집 현관까지 이어지는 중앙 길인 알레 상트랄(Allée Centrale) 양쪽 화단에 채워진 식물들은 모네의 일과 삶의 중심에 있었다. 장미가 아치를 타고 자라고 한련화가 땅을 덮고 있는 알레 상트랄. 샘터 제공
1905년 촬영된 지베르니 르클로노르망 정원 꽃밭에 서 있는 모네. 모네는 동쪽 화단에는 한 종류의 꽃만 심고 ‘물감상자 화단’이라고 불렀는데, 이 화단에서 꽃을 꺾어 집을 장식하곤 했다. 대부분 한 종류와 한가지 색만 심었지만 같은 종의 두 색을 섞어 심기도 했다. 샘터 제공
1883년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원하는 집을 찾게 되었다. 모네가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초록색 덧문이 있는 분홍빛 집 르프레수아르(Le pressoir)의 모습. 그는 처음에는 세를 들어 살다, 미술상에게 돈을 빌려 아예 매입하고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모네의 작품 속 전원 풍경에 매료된 많은 인상파 미국 화가들이 지베르니에 찾아와 머물렀다. 샘터 제공
봄의 서쪽 정원. 모네는 아르장퇴유 정원에서부터 무척 좋아했던 아이리스와 달리아를 비롯해 더 다양한 식물들을 심었다.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생기가 흘러넘치는 화려한 장관의 화단이 꾸려졌다. 모네가 좋아한 키가 큰 데이지나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개미취 등 높고 큰 식물들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샘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