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형 워릭대 교수는 인터뷰 내내 기자에게 역질문을 했다. 사진을 찍으며 ‘인생의 책’이 뭐냐고 묻자 다시 그 질문이 되돌아왔다. “한 권을 꼽기가 정말 어렵네요. 기자님은 어떤 책이에요?” 최근 나온 그의 책 부제도 ‘질문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김민형(57) 서울고등과학원 석학교수는 올해 초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과 교수를 사임하고 영국 워릭대 수학과 및 수학 대중교육 석좌교수로 옮겼다. 그가 2012년부터 재임한 옥스퍼드대를 떠나기로 결심한 데는 수학 대중교육을 폭넓게 지원하겠다는 워릭대 제안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가 수학 대중강의 내용을 묶어 재작년에 낸 책 <수학이 필요한 순간>(인플루엔셜)은 지금껏 8만권가량 나갔다. 수학 대중서로는 이례적인 ‘흥행’이다. 2년 만에 다시 대중강연 내용을 풀어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출간한 김 교수를 지난 20일 서울고등과학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제가 원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대학에서도 다른 전공 분야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일반인들과 이야기하다 양쪽 다 흥미를 느낄 만한 수학 이야기가 나오면 즐거워요. 전혀 수학을 못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대화 중에 수학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때 무척 즐겁죠.” 그는 새로 옮긴 워릭대에서 ‘수학과 세상’이라는 대중강연 시리즈 책임을 맡아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여름 두 달 동안 중학생과 고교생, 작가, 기자, 수학교사 등 출판사가 공지해 모은 7명의 일반인과 수학 세미나를 했다. 수학사와 수학의 주요 개념에 대한 탐구를 통해 수학의 본질을 묻고, 수학과 세상의 관계도 따지는 공부였다. 그는 책에서 오늘날 수학자들은 수학을 ‘자연 현상을 파악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고 썼다. 19세기 들어 다비트 힐베르트 같은 수학자들은 ‘수학은 선험적인 지식’이라는 독일 철학자 칸트의 영향을 받아 집합론과 공리 체계로 수학을 완벽하게 기술하려고 했지만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쿠르트 괴델이 ‘증명이 되지 않는 참인 명제가 어떤 공리 시스템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수학에서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서 여러 차례 수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공부”라고 강조했다. “세상을 파악할 때 필요한 도구가 수학이라는 거죠. 영국에서 코로나 초기 단계 때 수학적 모델을 많이 써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률을 전망했어요. 미분 방정식으로 시뮬레이션했죠. 이 모델 중에 맞은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어요. 정책 수립자가 수학을 모르면 감염률 전망에 대한 판단이나 비판에서 차이가 있겠죠. 요즘 회사에서도 데이터 분석이나 마케팅, 회계 쪽에선 정보 입수나 처리가 중요해지고 있어요. 이 기업의 대표가 수학을 알 때와 모를 때도 차이가 크겠죠.”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하기 어려운 복잡한 컴퓨터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진단하고 검증하는 것 역시 수학자의 일이라고도 했다. “요즘 나라별 행복지수가 많이 나옵니다. 보통 북유럽 국가들이 높게 나오죠. 이 지수도 자살이나 살인율 등 통계를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요. 주관이 작용하는 이 지수도 수학적 통찰력이 없으면 비판하기 힘들어요.”
‘대화주의자’ 김 교수는 기자에게 번번이 역질문을 던졌다. “몇 년 전에 누구든지 자기 수입이 세계에서 상위 몇%인지 계산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생겼어요. 그때 한국 직장인의 평균 수입이 3천만원을 조금 넘었어요. 이 정도면 전 세계에서 상위 몇 %일까요?” ‘대략 10%’라고 답하자 그는 “아니에요. 상위 0.8%입니다”고 받았다. “이 계산도 데이터 수집과 처리 문제가 매우 중요해요. 전 세계 사람들의 수입을 다 알아야 하잖아요. 미국에서 매일 코로나 감염자 수가 나오지만, 그 큰 나라에서 어떻게 매일 환자 수를 셀 수 있겠어요. 수학 모델의 도움을 받을 겁니다.” 그가 들려주는 ‘수학과 세상’ 이야기는 자신의 예일대 박사과정 지도교수 서지 랭(1927~2005)의 활약으로까지 이어졌다. “랭 교수는 1980년대에 <문명의 충돌>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1927~2008) 교수가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NAS) 회원이 되는 걸 홀로 싸워 저지했어요. 헌팅턴 교수는 영양섭취 정도나 티브이 수상기 대수, 언론사 수 등 별의별 지표를 합쳐서 나라별 행복지수를 만들었어요. 그 결과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편 남아공의 행복지수가 높게 나왔어요. 랭 교수가 이걸 문제 삼았어요. 이 지수를 두고 ‘수학의 오용’이라고 했죠. 수학적 공식으로 포장해 남을 겁준다고요. 반면 헌팅턴 지지자들은 랭 교수가 이념에 기반해 공격한다고 맞섰죠.”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미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에게는 세계적인 수학자란 수식이 붙는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서 유래한 산술대수 기하학의 고전적인 난제를 위상수학의 혁신적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세계적인 수학자의 대중강의’에 어떤 뜻이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과학이나 기술, 경제 분야의 지식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그런데 이 지식을 받아들이면서 수학이란 장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자연과학 쪽이 그렇죠. 제 강의를 듣고 수학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중강의는 전문적인 수학 연구에도 도움이 될까. “당연하죠. 사람들의 지식이나 감수성은 복잡한 경로로 연결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호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수학의 전문적 영역에 파장을 일으키죠. 기자도 그럴 겁니다. 깊이 들어가면 전문성을 갖게 되고, 그 전문성은 대부분 세상만사와 연결되지 않나요?”
2년 전 출간 수학대중서 8만권 팔려
최근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 내
“수학은 자연 현상을 파악하는 과정”
올해 초 옥스퍼드대 교수 사임하고
워릭대 수학 대중교육 석좌교수로
‘수학과 세상’ 대중강연 시리즈 준비
김 교수는 인문학자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차남이다. 중1 때 몸이 아파 자퇴하고 중·고교 과정을 독학했다. 논리학에 흥미를 느껴 고려대 철학과를 잠시 다니다 진로를 바꿔 서울대 수학과에 들어갔다. “15살 무렵에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를 수수께끼로 기술한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그때 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수학으로 전공을 바꾼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다만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학이나 물리학은 테크니컬한(기술적인) 내용이라 대학에서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철학은 나중에 배워도 될 것 같았고요.” 그는 “철학도 세상을 이해하는 게 목적”이지만 “17세기 이후에는 과학 지식 없이는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고 했다. “제가 만난 영국 철학자가 그래요. 수학이 많이 나오는 인공지능을 보면서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데 장벽을 느낀다고요.”
한국 초등생들은 인생 ‘성공’을 위해 학원에서 고교 수학을 배우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한 마디 조언해달라고 하자 그는 “잘 모르는 문제라 조심스럽다”며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수학 교육이라기보다는 입시 교육 시스템의 문제이겠죠. 한국 수학 선생님의 질은 매우 뛰어나요. 연수 시스템이나 급여도 다른 나라와 견줘 괜찮아요. 제가 보기에 부모님들이 세상을 너무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압력이 큽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자녀의 미래가 그렇게 될 확률은 높지 않아요.”
수학 전공 대학생들의 수준을 묻자 그는 “서울대나 포스텍 등 중심적인 대학만 놓고 보면 제가 학생일 때와 견줘 비교가 안 되게 뛰어나다”고 답했다. “교수들 수준도 많이 좋아졌고 인터넷 덕분에 학생들도 자신이 원하면 어디든 쉽게 좋은 수학을 접할 수 있어요.” 대학에서 학생 수준 저하를 걱정하는 교수 목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 반대는 오랜만이라고 하자 김 교수는 ‘비교의 오류’란 말을 꺼냈다. “제 판단이 현실적입니다. 교수들은 대부분 자신이 대학을 다닐 때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어요. 과거에 가장 뛰어난 학생과 지금 평균 학생을 비교하면 그런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죠. 두 개의 정치·사회 시스템을 비교할 때도 한 사회의 나쁜 시스템과 다른 곳의 좋은 시스템을 비교해 평가하는 일이 많아요. 비교의 오류이죠.”
영국에선 수학과가 최고 인기 학과 중 하나란다. “의대보다 인기가 좋아요. 영국에서는 수학을 토대로 컨설팅하는 회사도 있어요. ‘스미스 인스티튜트’라는 곳인데 제 박사과정 제자 둘이 다닙니다. 전기 공급 회사나 농업 기업 등에 컨설팅을 한다고 해요.”
부친에게 받은 가장 큰 영향이 뭐냐고 묻자 그는 “부모한테 받은 영향은 복잡해 한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다”며 한참 생각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세상사에 대한 깊은 관심입니다.”
꿈은? “뚜렷한 꿈은 별로 없어요. 전 이기적인 학자입니다. 꿈은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을 때 갖는 거잖아요. 저는 그런 것보다는 제가 보고 이해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