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박노해 사진에세이
박노해 지음/느린걸음·1만8000원
경험해보지 못한 단절, 길이 끊긴 시절이다. 비행기표와 차표만 구하면 세계 어디든 열려 있다고 생각했던 길들이 모두 막혀버렸다. 코로나19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길도 닫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접촉’도 단절됐다. “지금 인류는 일제히 마스크를 낀 ‘묵언수행’중이고, 자발적 강제로 문을 닫아건 ‘방안거’ 중이다.” “그럼에도 코로나 시대 안에서 우리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시인 박노해는 말한다. “지구 인류 문명의 정점에서 기습당한 코로나 시대를 기회 삼아, 새로운 철학과 삶의 양식을 찾는 길로 나아가야 하고, ‘더 나아지는 나’로 도약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세번째 사진에세이는 <길>이다. 작가가 지난 20년간 지구 곳곳을 다니며 카메라에 담아온 길들을 흑백사진과 짧은 산문, 시와 함께 묶었다. 한 사진에서 멀리 강줄기를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는 여행자들의 등 뒤로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말은 순한 눈빛으로 여인을 위로하듯 조용히 서 있다. 중국 대초원 루얼까이에서 굽이쳐 흐르는 강물에 내린 석양을 찍느라 분주한 관광객들과 종일 손님을 태우지 못해 마음이 무거운 티베트 여인의 저녁 기도 시간을 한 프레임에 담았다. 다음 페이지에 작가는 이렇게 썼다. “굽이굽이 흘러온 강이 전하는 이야기./ 삶은 가는 것이다. 그래도 가는 것이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릴지라도/ 서둘지 말고 가는 것이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작가의 사진 속 모든 길에는 사람이 있다. 치마를 걷고 층층 논 사이로 벼 심는 농부들에게 줄 새참을 든 채 물길을 걸어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여성, 돌투성이 황량한 산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볼리비아의 광부, 인도 카슈미르의 산길에서 막내의 손을 꼭 잡은 누나와 동생 삼남매가 봄을 기다리는 ‘나무돌이’를 하고 있는 모습 등 지구촌 곳곳에서 삶을 견고하게 이어가는 길 위의 풍경들이다. 고단함이 묻어나는 풍경들 사이로 ‘길 위의 학교’에서 복작대며 공부하는 파키스탄 펀자브의 아이들, 상처투성이 시리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바그다드 카페’라는 느긋한 손팻말을 건 허름한 손수레 등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른바 ‘뉴노멀’이라는 불투명한 미래의 길 앞에서 저자는 “진정한 자신을 사는 용기”를 잃지 말고 “결정적 한 걸음”을 내딛으라고 말한다. 자신을 믿는 것만이 수많은 걱정과 불안과 문제를 소멸시키고 ‘더 나아지는 나’로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