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1만6800원
‘감정 법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혐오, 수치심, 분노, 용서 등 인간의 감정과 법 제도를 연결시켜온 미국 철학자 마사 C. 누스바움(73)의 2018년작을 우리말로 옮겼다. 원제는 ‘두려움의 군주제: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열쇳말은 말 그대로 ‘두려움’. 누스바움은 2016년 선거 결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해질 즈음, 영예로운 상을 받으러 간 교토에서 홀로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밤잠을 설쳤다. 자신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했고, 이런 두려움이 미국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이 분노, 혐오, 시기 같은 유해한 감정을 만나 공동체를 해치는 독기를 뿜어내며 화학 반응한다는 확신 속에 초안을 썼다. 해서 이 책은 학술서라기보다 대중적인 인문교양서에 가깝고 심지어 300쪽이 채 되지 않는 적당한 두께의 ‘배려’까지 갖추게 됐다.
누스바움은 첫머리부터 자신이 ‘감정’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노동자 출신이었지만 성실함만으로 지역 유명 로펌 파트너 자리에까지 오른 아버지는 인종차별주의와 소수집단에 대한 강한 혐오를 갖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모순을 발견했지만 누스바움 자신도 어렵지 않은 길을 걸었다. 서구 백인 지식인 여성으로서 “회피하지 못했던 유일한 차별”로 그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든다. 이것이 “하버드 종신 재직권을 받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낱낱이 밝히는 건, 대안을 마련해야 할 학자의 책무로서 자신의 경험까지 기꺼이 분석의 재료로 내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스로 시인하다시피 법학 박사 학위 없이 누구보다 가부장적이고 부권적인 ‘법의 세계’에서 논쟁하며 고투한 끝에 권위를 인정받은 73살 원로 여성 교수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혐오와 수치심>(2004, 한국어판 2015) <정치적 감정>(2013, 2019) <분노와 용서>(2016, 2018) 등을 선보인 그는 왜 ‘감정’ 연구가 중요한지 설명한다. ‘감정’은 절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누스바움은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혐오하는 감정들 중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결코 없다.” ‘감정의 자연화’를 거부하는 데서 민주주의가 싹튼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오래고 강한 믿음이다.
이번 책은 고대 그리스 로마 사상과 근대 철학, 심리학, 역사, 과학과 예술 분야까지 아울러 ‘두려움’이란 감정을 해부한다. 나아가 두려움이 유발하는 유독한 감정인 ‘분노’ ‘혐오’ ‘시기’까지 진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이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괴로움과 그걸 물리칠 힘이 없다는 무력감의 결합 때문에 생긴다고 했다. “나쁜 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꼼짝할 수 없다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민주주의는 우리가 두려움에 굴복할 때 무너진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연설이 정확하고도 예리했다고 말한다. 두려움은 “공격적인 타자화 전략”으로 이어지며 통제해줄 누군가의 보호 또는 독재적 지배자를 호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각자의 미래를 동료 시민의 손에 기꺼이 맡긴다는 뜻”의 신뢰와 관련이 있다. 이는 반대로 동료 시민과 국가, 그리고 법질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두려움은 응보적 분노, 혐오로 이어진다는 뜻도 된다. 요점은, 두려움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개개인은 타인을 마음대로 하려는 유아적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인간의 절대군주적 심성과 나르시시즘을 먹고 자란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1862).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를 쫓는 복수의 여신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두려움이 유발한 ‘분노’에 관해서는 <분노와 용서>에서 이미 검토한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다시 거론한다. 형법 제도의 탄생을 은유하는 이 비극엔 법질서의 도입 과정이 담겨 있다. 애초 인간의 죄를 심판한 것은 시끄러우며 역겹게 생긴 ‘복수의 여신들’이었는데, 나중엔 ‘법’이 자리를 대신한다. 이와 함께 분노의 여신들은 ‘자비로운 여신들’(에우메니데스)로 거듭나게 된다. 누스바움은 여기서 본인이 전작 <분노와 용서>에서 빠뜨린 부분이 있다며 적는다. “바로 응보적 분노의 원인이자 공범이기도 한 두려움의 역할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분노에 저항하고 정치 문화에 미치는 분노의 영향을 억제해야 한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무력한 신체, 자기애,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의 조합이라며 ‘보복’에도 확실한 반기를 든다. “민주주의는 파괴적이고 헛된 보복 욕구를 포기하고 인간의 안녕과 사법정의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혐오’에서는 “투사적 혐오”를 파고든다. 체액이나 배설물 등 신체 분비물에 대한 구역질 같은, 즉각적인 혐오를 취약한 집단에 투사하는 이 혐오는 (미국에서) 주로 유대인, 무슬림,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을 대상으로 한다. 그들과 접촉하지 않는다면 서구 백인 집단은 오염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은 ‘동물성’을 회피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여성을 비난하며 주로 사용했던 생리혈, 처진 살의 비유 또한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두려움과 연결된 세번째 감정, 시기심은 분노의 보복적 측면과 비슷하다. 자신에겐 없지만 타인이 가진 것을 보며 비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 감정은 적대감을 만든다. 지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타인의 성공에 집착”하며, 정치 영역에서는 여성, 이민자, 엘리트 들이 자주 시기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누스바움은 여성 혐오를 “견고한 이해관계를 지키겠다는 남성들의 결심”이라 정의하고 그 뿌리에는 “잠재적 상실에 대한 불안과 이기심”이 있다고 설명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섹스 상대로서의 의무”부터 제 자식 양육까지 전통적 구실을 거부하는 여성은 불안을 야기한다. 그런 여성은 남성이 ‘앉아’라고 명령해야 할 “날뛰는 개” 또는 “규칙 위반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경쟁자가 되어 성공하게 되면서 만연해진 시기심이 여성혐오의 본질이라고 누스바움은 분석한다. “두려움에 바탕한 시기로 인한 여성혐오”는 여성의 육체성을 강조한다. 구역질나는 액체 덩어리를 배출하는 여성, 월경하고 출산하고 섹스하는 여성을 금기와 연결한다. 하지만 “여성혐오는 순간의 위안일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분석하고 논의하는 데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를테면 법원의 낮은 성범죄 양형기준에 반발하고 분노한 이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누리집 ‘디지털교도소’를 보자. 그의 논지대로라면, 고통에 대한 사적 해결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행위다. 사회 지도층, 엘리트 들의 행위에 쏟아지는 집단적 분노 또한 그 지위를 갖지 못한 자들의 시기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또한 민주주의의 저해요소다.
공동선을 위해선 누스바움의 말대로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동료 시민’으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기본적인 합의다. 그러나 민주적 법절차와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법꾸라지’들의 독식적 행위는 어떻게 볼 것인가? 관대한 성범죄 양형기준은 여성혐오나 성차별적인 ‘감정’이 법 제도에까지 스민 것이 아닌가? 정당한 법적 절차로 다른 나라를 ‘보복 공격’하는 행위는 정당한가? 두려움은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두려움 없이 타인을 배제하고 착취하는 것 또한 해악 아닌가?
하지만 이런 질문을 낳게 한 노련한 법철학자가 책 뒷부분에서 내놓는 대안이 다소 맥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추상보다 작은 일상에서 감정적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며 “건설적인 노력과 화해라는 목표”, “아름답고 선한 것들에 집중”하는 일의 중요성을 밝힌다. “인간의 진보”, “더 나은 시대”는 누스바움 법철학의 일관된 지향이다. 하지만 마틴 루서 킹이나 넬슨 만델라의 훌륭한 사례를 들고 ‘품위있는 투쟁’을 강조하는 데서 보수적인 법철학자의 한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려주는 10가지 ‘핵심 역량’(생명, 건강, 관계, 인간 이외의 종, 놀이, 환경통제 등)은 입법 원칙의 토대로 삼을 만한 제안이다.
분명한 건, 이 책이 ‘누스바움의 민주시민 교과서’라고 할 만큼 쉬우면서 그의 무거운 철학서들을 읽는 길잡이가 될 만큼 전작들을 통괄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한 사랑, 희망, 화해를 말하는 노교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당부한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 경험이 없는 내성적이고 허약한 철학자가 아닌, 세계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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