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이순의 언저리에서

등록 2020-09-18 05:00수정 2020-09-18 10:00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안상학 지음/걷는사람·1만원

안상학(사진) 시인이 어느덧 “이순의 언저리에”(‘생명선에 서서’) 이르렀다. 신작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에서 그의 시선이 자주 과거와 고향으로 향하는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선에 서서’에서 시인은 자신의 개인사를 역순으로 거슬러 오른다. 영화 <박하사탕>과 함께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떠오르게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딸, 권정생 선생과 몽골 초원 자작나무가 번차례로 출몰하며 시인의 지난 삶의 풍경을 그려 보인다. “더 이상 어려지지 않는 길 앞에서” 제 삶을 향한 순례를 마친 시인은 새삼 아득하고 막막한 심사에 사로잡힌다. “되짚어 나갈 길이 아득하다/ 저 길을 다시 어떻게 걸어가나 두 번 다시 못 걸을 길”.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백석의 화자가 사는 좁은 방의 흰 바람벽으로는 두 번에 걸쳐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가 그것들이다. 안상학의 시에도 이와 비슷한 삶의 대차대조표가 등장한다.

“굽어보는 그 길 오른쪽으론/ 떠나가는 것들, 눈물 나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쓰러지는 것들, 절망하는 것들, 그리운 것들, 그늘 진 것들이 있고,/ 굽어보는 그 길 왼쪽으론/ 돌아오는 것들, 눈물 닦는 것들, 나타나는 것들, 일어서는 것들, 희망하는 것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햇살 바른 것들이 있다”

백석 시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이 오히려 하늘의 사랑의 증거라면, 안상학 시에서도 눈물과 절망과 그늘은 다시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인이 “코앞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바닥”(‘바닥행’)이라거나 “나는 무덤보다 더 깊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입춘’)라며 거듭 바닥의 고통을 토로하지만, 그에게 희망의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낮은 언덕”을 하늘로 삼았던 가난한 성자 권정생, 뇌출혈로 오른쪽을 잃었지만 “왼쪽을 얻은 친구”(‘좌수 박창섭’)와 함께 고향 음식인 안동식혜의 오묘한 맛이 그를 어르고 달래며 힘을 주는 것이다.

“살얼음 사각대는 맑고 발그레 싹싹한, 생강과 고춧가루와 엿지름을 한데 훌 버무려 걸러 짜낸 물에 뽀얀 찹쌀과 노리끼리한 차좁쌀로 쪄낸 밥알 사이사이 깍둑썰기를 한 무꾸 조각들이 서성이는, 그 위에 채를 친 밤과 땅콩 몇 낱 고명으로 올린,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그 맛”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