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
로라 대소 월스 지음, 김한영 옮김/돌베개·4만8000원
소로. 월든의 호숫가 숲에서 살아가던 은둔자. 노예제도에 반대하며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 투옥되고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에 영감을 준 시민불복종 운동가. 1817년 태어나 1862년까지 45년 생애 동안 철저한 자연주의자로 살다 간 비범한 사람.
여기까지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소로의 모습이라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이해를 증진시킨다. 미국 노터데임대 영어학과 교수인 지은이 로라 대소 월스가 소로의 탄생 200년을 맞아 쓴 이 전기는, 지금까지 어떤 책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심층적인 소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은이는 소로가 월든 숲에서 은거한 기간이 2년 2개월 2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거의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갇힌 옥중 체험이 사실 하룻밤에 그쳤다는 점을 포함해 소로가 “콩코드의 신비한” 인물이었으며 “근대과학과 싸운 초월주의자”, “사회와 싸운 개인주의자”였다는 점을 밝힌다. 그는 성적 지향도 모호해 육체적으로 대개 남성에게 끌렸지만 사랑한 여성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 소로는 “생식 에너지”를 우리가 통제할 때 그것이 “활기와 영감을 준다”고 여겼으며, “금욕적 종교의 노수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세계적 작가, 자연과학자, 정치적 운동가, 정신적 구도자의 삶이 통째로 결합한 인물로서 소로는 “온전한 삶을 영위한 인간적 존재”, ‘더 높은 법칙’을 추구한 사상가였다는 것이다.
<월든> 속표지. 동생 소피아 소로가 그린 소로의 집과 “나는 낙담의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소로의 모토가 함께 새겨져 있다. 위키 오픈 소스, 돌베개 제공
“소로의 가장 뛰어난 통찰은 자연과 사회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부자나 빈자, 동식물이나 야생동물이 모두 ‘도덕적 관심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믿었다. 사회적 행동주의를 부르짖었으며 지구환경윤리까지 고려해 “자연에서 사회를 발견”했고 “모든 곳에서 자연을 발견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종의 기원> 전체를 제대로 읽은 자연과학자로도 꼽힌다.
소로 일가는 1685년 구교를 신봉하는 프랑스에서 도망쳤던 위그노 교도 출신이었다. 그는 프랑스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그런 점에서 양키 이웃들과는 달랐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어머니 신시아는 자유주의 사상을 당당히 옹호하며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아 인습적인 이웃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미국 최초이자 가장 활동적인 반노예협회 중 하나인 콩코드 여성반노예제협회가 그 지역에서 탄생했는데 소로 가문 모든 여자들이 그 운동에 열렬히 참여했다. 하지만 당시 여성은 연단에 오를 수 없었다. 교회가 급진주의자의 연설까지 금지하자 소로의 누나 헬렌은 이에 반발해 발길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1856년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찍은 은판사진으로, 이 사진은 소로가 친구에게 준 복사본이다. 소로협회 및 월든숲프로젝트, 돌베개 제공
어린 시절 소로는 “누가 이 모든 땅의 주인이에요?”라고 묻던 당돌한 소년이었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뒤 도서관에서 식물, 새, 곤충 연구를 익혔으며 성서와 그리스 로마 신화와 철학을 접했다. 1837년 초월주의의 위대한 선언인 랠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의 <자연>을 읽은 그는 졸업식장에서 돌진하듯 말했다. 상업은 도덕적 자유를 파괴하고, 물질적 재화에 인간을 결박하고 인간을 구속한다고. 에머슨과 만난 1837년 10월22일 이후, 소로는 변했다. 고독한 다락방과 글쓰기 도구인 펜을 갖춘 소로는 ‘하버드 졸업생’에서 “자기 수양”을 거치는 초월주의 수련가가 되었다. 에머슨과 소로는 평생 애정과 격려, 대립과 분노, 화해를 되풀이했다.
1854년 12월, 리케슨이 소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린 그림. <대니얼 리케슨과 그의 친구들>(보스턴, 1902), 돌베개 제공
소로의 동료들로는 ‘초월주의의 교황’이던 윌리엄 엘러리 채닝(1780~1842), 미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마거릿 풀러(1810~1850), 사상가이자 교육가 브론슨 올컷(1799~1888) 등이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초월주의자들은 문예지 <다이얼>을 발간하고 “내면에 신의 원리가 거주하고 있다는 믿음”을 널리 알리려 했다. 노예제 폐지와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불평등 종식은 그들의 중요한 목표였다. 적어도 6개 언어를 읽을 줄 알았던 소로는 <논어> <사서> <묘법연화경>과 고대 힌두 경전, 조로아스터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고 종합해 고대의 영적 전통을 되살리려 했다. 소로가 동양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풍경화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가 1853년에 그린 <카타딘산>. 1846년 소로는 카타딘산에 매혹되어 정상 가까이까지 갔다. 1857년 다시 정상에 오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예일대학교 미술관, 돌베개 제공
1845년 3월부터 2년여 동안 월든 호숫가 숲속 오두막에 살면서 그는 “말이 아닌 몸으로 글을 쓰고” 지냈다. 집은 백송으로 만든 사원, 식사는 성체를 드는 것에 비유했다. 생태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그는 생태주의의 원칙을 세웠고 채식주의자들이 많지 않던 시절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삶의 가닥을 잡았다. 때로 우울하고 자주 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수탉처럼 만만하고” 확신에 차서 으스대는 떠들썩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이를 가리켜 “거대한 도플갱어”라고 표현한다.
소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창살 앞을 지나가던 에머슨이 “왜 거기 있느냐”고 묻자 소로가 “당신은 왜 여기 없느냐”고 물었다던 유명한 에피소드는 거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소문은 소로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로는 ‘시민 정부’가 불의를 자행한다면 복종이 아니라 저항이 시민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는 윤리적 공동체의 범위를 비인간 세계로까지 확장했다. 그의 작품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 보낸 일주일>은 그 스스로 천지창조의 이야기이자 지식의 창세기라 표현할 정도였다. 소로는 그저 ‘자연’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던 공유지를 탐사했고,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인류의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고 믿었던 그는 죽어갈 때도 정신상태가 몹시 고양되어 있었고,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낙엽은 우리에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일러 준다.”
애정과 진정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은이는 “소로가 두려워하며 예견했던 바로 그 미래가 당도한 것”이라며 “우리는 세계적 불평등, 지구 생태계 파괴, 여섯번째 대멸종을 목격하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모든 글은 희망의 제스처”라며 “계속 글을 쓰고, 계속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라고도 덧붙였다. 높은 수준의 원문, 충실한 번역, 정성스러운 편집과 만듦새가 좋은 합을 이뤄 근사한 독서 체험으로 이끈다. 다소 큰 크기, 808쪽의 두께를 가졌지만 읽는 데 걸림이 없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월든>(1845)의 ‘겨울 호수’ 편에 실려 있는 ‘월든 호수: 축소 평면도’. 돌베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