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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46년생 순자’와 그의 딸들

등록 2020-09-18 13:45수정 2020-09-24 13:05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질문에서 출발한 소설 ‘연년세세’

연년세세

황정은 지음/창비·1만4500원

연작 소설 <연년세세>를 낸 소설가 황정은.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연작 소설 <연년세세>를 낸 소설가 황정은.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황정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는 네 단편으로 이루어졌고 이 가운데 두 편은 미발표작이다. 연작의 중심 인물은 1946년생 여성 이순일이고 그의 두 딸 한영진과 한세진이 보조적인 역할을 맡으며, 그밖에 영진·세진 자매의 아버지 한중언과 남동생 한만수, 영진의 남편 김원상, 세진과 동거하는 하미영 등이 비중 있게 나온다. 외형적으로 <연년세세>는 세대를 이어 가며 유구하게 펼쳐지는 가족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연작의 첫 편인 ‘파묘’는 세진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세진이 어머니 이순일을 모시고 철원에 있는 어느 묘를 파 없애러 다녀오는 이야기다. 묘의 주인은 순일의 외조부. 돌림병과 전쟁으로 부모를 차례로 잃은 어린 순일을 키워준 어른이다. 외조부가 돌아가신 뒤 순일은 해마다 성묘를 다녔는데, 이제 기력이 달려 파묘를 결정한 것.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느냐는” 언니나 아버지와 달리, 세진은 그곳이 어머니에게 지니는 의미를 헤아리고 공감하는 편이다. 어머니를 제 차에 태워 서울에서 철원 골짜기까지 먼 성묘 길을 다녀오는 세진의 행위를 만수는 효도로 이해하지만, 세진의 생각은 다르다. 효도라기보다는 어머니라는 한 인간의 한과 슬픔에 대한 공명이라는 것이다.

연작 두 번째 작품 ‘하고 싶은 말’은 첫딸 영진의 시점을 택한다. 그는 자신이 “없는 집 기둥”으로서 “가족을 감당했다”는 자부심을 지닌 사람이고 그런 그의 생각에는 일리가 없지 않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유통업체 판매원으로 취직했으며 지금까지 남편과 맞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안정적인 직장이 없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글을 쓰며 사는 동생 세진의 삶은 불안하고 미심쩍기만 하다.

그런 자부심과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동생 만수가 취업 및 이민 준비차 가 있는 뉴질랜드에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같이 가겠냐는 세진에게 영진이 “난 시간도 없고 여권도 없다”라며 퉁명한 답을 내놓은 것은. 게다가 영진은 뉴질랜드 여행에 엄마를 데려가는 건 어떻냐고 역제안을 해 놓고는 그 일을 내내 마음에 걸려 한다. “한세진과 대화하면 자주 이렇게 되었다. 언짢고 불편해졌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말들 때문에.”

소설에는 이렇게, 내뱉어 놓은 말을 후회하는 장면들이 여럿 나온다. 역시 ‘하고 싶은 말’에서 영진은 어느 날 밤 엄마 순일이 낙태 수술을 두 번이나 했었노라고, 처음 듣는 말을 하자 “알았으니까 이제 자요. 너무 늦었어”라고 말을 끊어 놓고는 뒤늦게 “묵직한 자루 같은 것이 명치를 향해 가라앉는 것 같았다”며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연작 마지막 작품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세진의 동거인 하미영이 기르던 고양이를 실수로 밟은 일로 땀과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자 세진이 “그러지 마”라고 말하는데, 이튿날 스스로 (아마도 정신)병원을 찾아 입원한 하미영을 배웅하고 돌아온 세진은 전날 밤 자신이 했던 말 “그러지 마”를 후회한다.

이런 사례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이 가족 이야기인 것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말이 초래하는 상처와 그에 대한 후회 및 용서 같은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다가오는 것들’과 함께 미발표작인 ‘무명’(無名)은 ‘파묘’에서부터 시작된 이 연작의 기원을 알게 한다. 이 작품에서 비로소 주인공 이순일은 딸들의 입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 속에서 순일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여읜 뒤 괴팍하고 이기적인 외조부 슬하에서 성장해서는 열다섯 나이에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라는 고모네 식모가 되어 실컷 고생하다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택해 그로부터 해방된다.

뜻하지 않게도 결혼은 순일이 잃었던 제 이름을 되찾는 계기가 된다. 그때까지 남들에게 순자(順子)로 불리고 자신도 그것을 제 이름으로 알았던 순일이 혼인신고를 하고자 호적을 떼어 보고서야 원적에 자기 이름이 ‘순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식모살이를 하던 고모네 옆집에는 동갑내기에 이름도 같은 순자가 있었다. 얼마 전 상을 당한 세진 친구의 엄마 이름도 순자요 또한 세진이 자주 가는 백반집 아주머니 이름도 순자라는 데에 이르면, 이 연작 소설은 순자로 대표되는 중·노년층 여성들의 간난신고와 애환을 그린 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무명’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때 순자였던 순일은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독백을 곱씹고, 지난 세월을 가리켜서는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를” 제 자식들은 “이야기로도 겪지 않기를” 바란다.

연작 마지막 작품 ‘다가오는 것들’에서 세진은 북페스티벌 참가차 동료 작가들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간다. 그곳은 9·11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세진이 한국에 두고 왔다고 생각한 민족사와 개인사의 아픔들이 좀비처럼 되살아나 그를 엄습하는 공간이다. 평화와 저항을 주제로 미국 작가들과 대담을 나눈 뒤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객석의 한 여성은 항의하듯 말한다: 한국의 입양아 수출에 관해서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검은 직모”를 지닌 이 인물은 동양인일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자신 한국 출신 입양아일 수도 있겠다.) 행사가 모두 끝난 뒤에는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온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의 손녀 제이미(그러니까 세진에게는 육촌동생)가 세진을 찾아온다. 제이미는 자신의 아버지인 노먼이 어린 시절 한인 구역에서 자랄 때 친구들이 제 어머니를 가리켜 ‘양색시’니 ‘양갈보’니 하는 말을 듣고 충격받고 상처를 입었노라고 말한다. 과거란 그리고 역사란 이렇듯 언제고 잊지 않고 찾아와 변제와 청산을 요구하는 질긴 채권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연작 소설 &lt;연년세세&gt;를 낸 작가 황정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연작 소설 <연년세세>를 낸 작가 황정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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