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16세기 조선이 사화를 통해 맞은 ‘엘리트 위기’의 극복 방안을 투명성과 유연성에서 찾았다. 서원을 건설해 인재를 배출하고, 퇴로를 개척해 고용과 퇴출의 순환구조를 이루자는 게 그의 전략이었다. 그림은 1577년에 그려진 <궁중계회도>. 계회도는 문인·선비들 모임을 담은 그림인데, 이 계회도는 선조의 형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원·하릉이 관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모임을 풍속화풍의 필치로 세밀하게 담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교국가의 대재난 ‘사화’의 시대를 산 퇴계
‘기묘사화’ 조광조 죽음 진단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50여차례 사직…서원 세워 도학자 양성
제자와 문답 글에 ‘인재 순환 시스템’ 통찰
‘기묘사화’ 조광조 죽음 진단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50여차례 사직…서원 세워 도학자 양성
제자와 문답 글에 ‘인재 순환 시스템’ 통찰
고전 다시읽기/퇴계 <자성록>
1997년 외환 위기에서 비롯한 과제를 두고 우리사회는 지금껏 씨름하고 있다. 특히 투명성과 유연성, 이 두 가지는 우리 경제가 풀어야 할 근본 숙제다. 해묵은 주장이지만,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퇴출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논조 속에 이런 문제의식이 잘 들어 있다.
전통사회에서도 국가적 위기는 존재했다. 역모와 반란, 당파간의 정쟁이 대표적인 위기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반기의 국가 위기는 ‘사화’라는 엘리트 위기로 나타났다. 잘 알려진 무오사화, 기묘사화 등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이 ‘자본’이기에 외환 위기는 자본주의 국가에게 치명적이다. 한편 유교사회를 이끄는 힘은 사람이다. (유교정치를 ‘인치’(人治)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러니 인재들이 죽음에 몰린 ‘사화’는 유교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대재난이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이 사화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특별히 젊은 시절 겪은 조광조사건(기묘사화)은 평생 화두가 되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사화의 원인을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선비들이 높은 지위를 탐한다는 점이다. 그의 말을 빌면 “학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너무 높은 곳에 처하며, 때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세상을 다스려 보겠다고 용감하게 나섰기 때문이다.” 둘째는 구조적인 문제다. 정치에 나아가는 길만 있지 물러나는 길이 없음, 즉 퇴로가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묘사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끝에 그는 “조광조가 오랫동안 물러나려 하였지만, 길이 없어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결론을 얻는다.
퇴계는 그 대책으로서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재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즉, 기술적 지식인이 아니라, 배움과 실천, 말과 행동이 딱 맞아떨어지는 신뢰받는 도학자를 길러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기관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서원이다. 사립서원으로서는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 군주의 담보를 요구하였다. (이것이 사액서원인데, 그가 만든 ‘소수서원’이 그 최초다.) 그는 서원을 준국가기관으로 공식화함으로써 인재의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서원 공식화 인재 투명성 확보
또 하나는 퇴출의 유연성, 즉 퇴로의 건설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칫 죽음을 당할 수 있는 미묘한 문제였다. 군주정치 체제인 조선에서 신하가 중도에 사퇴한다는 것은 곧 임금에 대한 비난을 뜻했기 때문이다. 자칫 목에 칼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한번 조정에 나서면 감히 물러나지 못했다. 퇴계는 이를 두고 “낚시에 걸린 꼴”이라고 묘사하였다. 이에 퇴로의 건설은 대단한 결단을 필요로 하였다. (그의 상소문과 편지에 ‘아프다’, ‘병들었다’는 말이 내내 들어 있는 점은 보다 정치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퇴로를 개척해나갔다. 군주의 호출에 대해 50여 차례에 걸쳐 ‘사직’을 하고, 또 ‘물러난다’는 뜻을 아예 이름으로 삼기도 하였다. 퇴계(退溪)라는 그의 호는 본시 토계, 즉 ‘토끼 골’이었던 지명을 그가 바꾼 것이다. 요컨대 그의 꿈은 과거를 통해 조정에 나아갔다가(進), 자리가 없으면 서원으로 물러나오고(退), 재교육을 통해 능력을 갖추면 또 조정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물러나오는, 그런 순환 시스템이었다. 이 구조가 뿌리 내릴 때에야 사화와 같은 국가위기가 극복되고 유교문명을 꽃피울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니 그를 그저 이기심성론, 사단칠정론을 논한 철학자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의 사유는 사물과 세계, 인간과 정치의 근원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이르렀다. 하나 정치세계를 도외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그의 물러남(退)은 소극적인 은둔의 길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를 위한 ‘새 길 만들기’였다. 오늘날 말로 번역하면, 서원을 통해 인재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퇴로를 건설하여 고용과 퇴출의 유연성을 확보함으로써 국가위기를 극복하려했던 전략가였다.
이런 퇴계사상의 근간이 담긴 책이 <자성록>이다. 이것은 그가 주변에 보낸 편지글 가운데 22편을 스스로 뽑아서 편찬한 책이다. 호한한 퇴계의 저술을 생각하면 작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이속에는 그가 생각한 자신의 핵심사상이 깃들어 있다. ‘스스로 반성한다’라는 뜻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남에게 말은 해놓고 행동은 따르지 못할까봐 반성의 소재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적극적 참여 위한 물러남
주로 제자들과 나눈 편지글이기에 <자성록>의 주제는 학문과 공부방법에 집중된다. 성리학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전, 특히 기대승과의 논쟁도 들어 있다. 영남의 노장인 이퇴계와 호남의 신예인 기대승 간의 깍듯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지연과 학연을 따지고, 나이로 쪼개는 이 지리멸렬한 세상에 맛보는 것만으로도 청신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 한편 그의 직제자들(정자중· 황준거· 김돈서 등)에게는 주로 공부방법과 처신, 예의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친절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성록>을 통해 상대를 무시하지 않고, 심하게 책망하지 않으며, 허튼 질문에도 깍듯하고 곡진하게 응답하는 퇴계의 사람다움을 엿볼 수 있다.
허튼 질문에도 깍듯한 응답
이 책은 후일 일본 유학자 야마자키 안사이에게 전해져 주자학의 일본 전래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퇴계사상이 책상머리에서 주자를 모방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사회가 제기한 정치적· 존재적 질문들을 주체적으로 추적하면서 형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퇴계는 ‘주자 무오류설’로 주자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주자와 합치한 만큼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주체적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자성록>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요컨대 그는 당시 조선의 위기극복 방안을 오늘날과 다를 바 없이, ‘투명성’과 ‘유연성’에서 찾았다. 서원을 건설하여 말과 실천이 부합되는 인재를 배출하고, 또 퇴로를 개척하여 고용과 퇴출의 순환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투명성 제고를 위해 그는 독창적인 ‘사상’을 수립했고, 퇴로의 건설을 위해 목숨을 건 정치적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자성록> 속에서 우리는 이 두 면을 잘 살필 수 있다.
천원권 화폐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퇴계를 만난다. 앞면에는 그의 초상이, 뒷면에는 그가 경영한 ‘도산 캠퍼스’가 그려져 있다. 그가 화폐 속에 들어있는 까닭은 단순히 조선의 대표적 철학자여서만은 아닌 듯 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생산하고 또 이를 실천해내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퇴계선생 자성록
도광순 역주
삼중당 펴냄(1990)
(운치 있고 고풍스런 번역이 옛 글 읽는 맛을 더한다. 세로로 편집돼 읽기가 불편한 것이 흠)
이퇴계의 자성록
최중석 역주
국학자료원 펴냄(2003)
(한글세대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에 공을 들였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편역
소나무 펴냄(2003)
(퇴계의 속뜻은 기대승과의 편지 속에 오롯하다. 두 사람간의 편지를 시기별로 재편집한 좋은 책)
50자 서평
◇ 김영두(<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옮긴이) “성리학 공부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책의 내용보다 남을 가르치려 쓴 편지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겠다는 편집 의도가 더 많은 걸 말해준다.”(<자성록>을 읽고)
◇ 짜우(인터넷서점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철학적 주제들에 천착하는 시간의 길이는 길든 짧든 문제가 되지 않을 듯 하다. 얼마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바라보고 판단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퇴계와 고봉…>을 읽고)
◇ <자성록>(국학자료원 펴냄)에서 “<자성록>은 보기에 따라서는 퇴계의 주저(主著)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학문과 인간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다음주 이후 고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데카메론>, <소피스테스>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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