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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족문학서 한국문학으로 백낙청의 중심이동

등록 2006-01-19 19:31수정 2006-01-20 15:33

백낙청 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백낙청 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40년간 민족문학론에 매달리던 그
‘분단시대 겸한 통일시대’에 접어들어
한국문학으로 깃발 바꿔들다
이는 유연한 변모인가 후퇴인가
민족문학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인 백낙청(68) 서울대 명예교수가 15년 만의 새 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창비)을 내놓았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2와 <민족문학의 새 단계>에 이은 네 번째 평론집이다.

앞선 세 평론집이 한결같이 ‘민족문학’을 제목으로 내세웠던 데 비해 이번 책에서는 그 자리를 ‘한국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대신 백 교수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를 부제로 삼음으로써 이 책이 앞선 평론집들의 연장선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 해도 ‘민족문학’이 주연의 자리에서 조연의 자리로 밀려난 느낌은 어찌할 수가 없다. 1970년대 이래, 아니 그 이전 1966년 초 계간지 <창작과 비평>의 창간 이래 40년 동안 줄기차게 민족문학론을 부르짖고 그 이론의 심화·확산에 매진해 온 그이기에 이런 변모는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문학 안팎의 어떤 상황 전개가 ‘백낙청표 민족문학론’의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물론 백 교수는 처음부터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의 역사성 또는 한시적 유효성을 향해 퇴로를 열어 놓기는 했다. 1978년에 낸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에서 그는 ‘민족문학’이 “그 개념에 내실을 부여하는 역사적 상황이 존재하는 한에서 의미있는 개념이고, 상황이 변하는 경우 그것은 부정되거나 한층 차원높은 개념 속에 흡수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새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민족문학’이 그보다 한층 차원높은 개념인 ‘한국문학’에 흡수되게끔 상황이 바뀌었다는 뜻이 되는 것인가.

백 교수의 이번 평론집은 1990년의 <민족문학의 새 단계> 이후 쓴 글들을 망라하고 있다. 대부분은 잡지 또는 창비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한 것들인데, 서장인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만은 이번 평론집을 위해 새로 써 넣은 신고(新稿)다. 그만큼 ‘민족문학에서 한국문학으로’ 중심이동을 행한 백 교수의 최근 생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15년여간 쓴 글 한데 묶어


백 교수가 90년대 이후 주력해 온 것은 문학보다는 분단과 민족문제 쪽이었다. 그가 주창한 ‘분단체제론’은 분단의 역사와 현실을 통일의 미래로 견인하고자 하는 한 실천적 지식인의 득의의 창안이었다 할 법하다. 분단이라는 민족의 현실과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국제적 상황을 한목에 살피려는 노력은 문학을 보는 관점으로도 이어진다. 특히 백 교수의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분단 극복이라는 우리 문학의 과제가 민족적 차원을 넘어 전세계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이다.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에서 민족적 차원이 차지하는 결정적인 비중이 도리어 전지구적인 문학옹호·예술옹호 기능의 강화라는 세계적 차원마저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24쪽)

새 평론집의 제목에 ‘한국문학’과 더불어 ‘보람’이라는 뜻밖의 낱말이 쓰이게 된 연유의 일단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백 교수가 ‘보람’이라는 말을 쓰게 된 또 다른 배경을, 지금이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는 과도기라는 현실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책 머리에’에서 그는 2000년의 6·15 공동선언과 지난해 6월 평양의 민족통일대축전, 8월 서울의 8·15민족대축전과 그 사이 7월 북쪽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등을 거론하면서 “분단체제가 동요기를 넘어 드디어 해체기에 접어들었고 오늘 이땅에 사는 우리는 ‘분단시대를 겸한 통일시대’라는 남들이 못해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신심”(6쪽)을 토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 교수가 ‘민족문학’을 버리고(?) ‘한국문학’을 새삼 채택하게 된 까닭을 그런 상황 변화에서 오는 여유 탓으로 볼 수 있을까. 말하자면, ‘민족문학’을 고집해야 할 절박성 또는 역사적 필연성이 잦아든 자리에 ‘한국문학’으로 외연을 넓힐 가능성이 들어섰다는 뜻?

민족문학 개념 사실상 폐기?

이 책에 실린 글들이 9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15년여에 걸쳐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가령 93년 가을에 발표한 <지구시대의 민족문학>이라는 글에서 백 교수는 기존의 ‘민족문학 진영’이 홀대해 온 시인 김기택씨와 소설가 신경숙씨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인 바 있다. 돌이켜 보면 90년대 초는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 전일 지배체제의 대두라는 세계사적 변화 앞에 국내의 진보운동 진영이 혼란과 위축을 경험한 시기였다.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백 교수의 이런 변모는 일종의 ‘후퇴’로 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았다. 백 교수의 ‘유연한’ 변모에 불만을 지닌 견결한 민족문학론자, 그리고 ‘민족문학’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꼬리표를 아예 떼어 버릴 것을 요구하는 ‘자유주의’ 비평가들이 드물게 합의하는 대목이 바로 ‘백낙청표 민족문학론의 후퇴’라는 지점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 교수는 최근에도 배수아씨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상세하고 우호적인 분석을 통해 자신의 변화된 문학관을 ‘과시’했으며, 그 점은 그가 편집인으로 있는 잡지 <창작과 비평>과 출판사 창비의 태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백 교수는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폐기한 것인가. 새 책에서도 그 점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민족문학의 방법론 내지는 정신이라 할 리얼리즘(현실주의)을 완강하게 붙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문학’이 곧 민족문학이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처리하고 넘어가는 듯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현 단계 한국문학에 대해 상당한 낙관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 초에 발표한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에서 그는 이렇게 전망하고 있다.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세계사적 의의로 가득 찬 과업을 수행중인 우리는 새로운 십년대에 이제까지의 실적을 능가하는 성과를 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205쪽)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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