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글날 기림 한글문화토론회’가 한겨레말글연구소와 한글문화연대 공동 주최로 10일 오전 11시부터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다. ‘공공언어 개선의 사회철학 세우기’를 대주제로 삼은 이 토론회에는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강미아 미국 유타밸리대 교수, 방민희 상명대 교수, 박성열 싱가포르대 교수, 정태석 전북대 교수, 장은주 영산대 교수가 참석한다. 발표자들은 어려운 외국어와 한자어에 오염된 공공언어가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훼손하고 엘리트 지배를 강화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공동선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공공언어를 개선하려면 국가와 사회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
기조 발제(‘공공언어와 인권’)를 맡은 이건범 대표는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공공언어를 훼손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Heart Saver’(하트 세이버)라는 상이 대표적이다. 제주소방청이 제주도지사 이름으로 주는 상이다. 처음 들으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인데, 알고 보니 ‘심장마비 응급환자’를 구한 구급대원에게 주는 상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제주소방청에는 ‘브레인 세이버’, ‘트라우마 세이버’라는 상까지 새로 생겼다. 평범한 한국어 사용자는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공공기관에서 상 이름으로 쓰는 것은 전형적인 ‘영어 사대주의’라고 할 만한 일이다.
몇 년 전 용인시 동천역 앞 찻길 바닥에 ‘Kiss & Ride’(키스 앤드 라이드)라는 영어 표지가 등장했다.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을 배웅하거나 마중하기 위해 차가 잠깐 정차할 수 있는 구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영어를 웬만큼 아는 사람도 도무지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말이다. 시민의 항의로 이 찻길 표지는 바뀌었지만, 곧이어 수원 광교중앙역 앞에, 다시 고양·이천·여주 등지에 이 표지가 새로 생겨났다. 이런 말들은 공공기관에서 한번 쓰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베껴 쓰기를 하는 바람에 전염병처럼 번지는 것을 막기 어렵다. 더 심각한 것도 있다. ‘어린이 식품안전 보호구역’을 뜻하는 ‘Green Food Zone’(그린 푸드 존)이라는 로마자 간판은 정부에서 법령의 시행규칙에 그렇게 표기하라고 정한 탓에 전국 1만여 학교 앞마다 들어섰다. 시민들이 항의해도 정부는 교체 비용이 너무 크다며 고치려 들지도 않는다.
이 대표는 이런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국민의 생활과 안전에 큰 영향을 주는 것들인데도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말로 저 높은 곳에서 명령하듯 내려오는 것이 공공언어의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야말로 통제되지 않는 무형의 권력이고, 국민의 입에서 나왔으나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재갈이다.” 이런 공공언어를 개선하자는 운동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민족주의, 국수주의, 국가주의’라고 비난하지만, 공공언어에 대한 시민의 비판과 개선 요구는 민주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활동이다. “공공언어에 대한 간섭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공공언어를 독식하려는 사람이다.” 이 대표는 어려운 외국어 남용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쉬운 공공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권을 지키고 키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민주공화주의 이념에 비추어 공공언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발달한 공화주의 이념은 ‘지배 없는 자유’ 곧 ‘아무에게도 지배받지 않을 자유’를 규범적 지향의 핵심으로 삼았다. ‘지배 없는 자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관건이 되는 것은 사람의 지배(인치)가 아닌 법의 지배(법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의 지배가 강제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으려면 그 법의 제정에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 내가 참여해 만든 법에 내가 따를 때 그 법의 지배는 일종의 ‘자치’가 되고 ‘자율’이 된다. 이 공화주의 이념을 구현한 나라가 공화국이며, 그 공화국을 시민이 주인이 돼 이끌어 갈 때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 장 교수는 이 공화주의 이념이 우리의 유교적 정치 전통에서도 민본주의와 군신공치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유교적 공화주의 정치의 흐름은 3·1운동을 거쳐 오늘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장 교수는 유교적 공화주의의 바탕이 된 것이 일종의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 원칙, 곧 누구나 실력을 갖춰 과거시험을 통과하면 사대부가 돼 통치에 참여한다는 원칙이었음을 거론한다. 하지만 이 능력주의 원칙에는 밝음만큼이나 그늘도 있는데, 오늘날 그 그늘이 짙어지고 있다고 장 교수는 지적한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이지만 내용을 보면 교육과 학벌에 따른 사회 계층화가 굳어지고 있으며 소수의 엘리트 집단의 권력 독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 교수는 소수 엘리트가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데 ‘언어’가 유력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새로운 귀족들의 지배체제’라 할 만한 이런 체제에서는 특별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론장을 장악하고 배타적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하여 영어나 다른 외국어가 표준어가 되고 우리말은 열등한 사투리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경향이 강화되면 민주공화국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게 된다. 장 교수는 공적 영역에서 어려운 한자어나 외국어가 난무하는 것은 일반 시민들을 배제하고 의사결정을 독점하려는 엘리트 집단의 지배 욕망이 낳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국가가 공적 영역에 개입해 공공언어를 일반 시민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공화주의의 이념인 ‘지배 없는 자유’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다. 장 교수는 소수 엘리트의 언어 독점을 방치하면 이런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막말 정치’가 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장 교수의 논의와 유사하게 정태석 교수도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을 빌려와 언어가 자본이 돼 계급격차를 키우는 양상을 분석한다. 박성열 교수는 언어가 곧 ‘정치적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공공언어가 계급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며, 사회적 약자를 편드는 공공언어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강미아 교수는 한류의 세계적 열풍과 이주 외국인의 대거 등장으로 ‘한국어의 세계화’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며 한국어 사용자들의 다양화 양상에 주목한다. 방민희 교수는 영국과 미국의 민간단체가 벌여 온 ‘쉬운 영어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이 운동이 시민의 권리를 증진하는 데 큰 이바지를 했음을 상세히 알려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한글문화연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