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누에들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었지

등록 2020-10-23 05:00수정 2020-10-23 10:02

등단 20년차 손홍규의 열 권째 소설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손홍규 지음/창비·1만4800원

소설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를 낸 소설가 손홍규. “등단 20년차에 다섯 번째 소설집을 묶다 보니 소설들과 함께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무언가 새롭게 출발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소설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를 낸 소설가 손홍규. “등단 20년차에 다섯 번째 소설집을 묶다 보니 소설들과 함께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무언가 새롭게 출발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손홍규는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해 올해로 작가 활동 20년차를 맞았다. 그동안 그는 올 6월에 나온 <파르티잔 극장>을 비롯한 장편 다섯 편과 소설집 네 권을 냈다. <그 남자의 가출> 이후 5년 만에 낸 소설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는 그의 소설책으로는 열 권째가 된다. 산문집은 제하고 소설만으로 2년에 한 권꼴이니 작가의 성실성을 짐작할 만하다.

이번 소설집에는 201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중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와 여덟 단편이 묶였는데, 수록작 중 상당수가 농촌에 사는 노인들 이야기인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맨 앞에 실린 ‘예언자’는 육십년 가까이 해로한 노부부의 이야기다. ‘노인’과 ‘노부인’으로 지칭되는 부부는, 처음에는 노부인이 다음에는 노인이 앞일을 내다보는 ‘예언’ 능력을 지니는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노인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뒤 지니게 된 능력이 흥미로운데, 그의 예언이 앞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다. 가령 그는 벌써 십년 전 군 복무 중이던 둘째 아들을 잃은 조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 둘째 말여. (…) 군대 보내면 안 되네.” 같은 방식으로 노인은 지나간 선거의 당선자들을 예측하고 걸프전 발발도 ‘예언’한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분간하지 못하는 노인의 상태는 그러니까 치매에 해당한다 하겠는데, 그냥 그렇게만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안쓰럽고 아릿한 대목이 없지 않다.

어느 날 노인은 처남에게 주겠다며 돈을 챙겨 나가려 한다. 그때 노인의 시계는 오십년도 더 전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인데, 일본 유학을 다녀와 인민위원회 간부를 지내고 빨치산으로도 활동했던 처남이 당시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매제를 찾아와 일본 밀항 자금을 요청했던 것. “노인은 고백이라도 하듯, 막상 노부인의 오빠에게 돈을 건네려니 아까워 가져간 돈의 반만 주고 말았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되돌리겠다며 돈을 갖고 나서려 하는 거였다.”

처남 가족에게 씌워진 이념적 굴레를 무릅쓰고 노인은 노부인을 아내로 맞았고, 그 때문에 결국 공무원 일을 그만두게 된다. 혼담이 오갈 무렵 중신을 섰던 먼 친척집에서 만난 청춘 남녀가 “그 집 곁채의 후텁지근한 잠실로 스며들어가 서로의 싱싱한 육체를 탐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누에들의 방에서 남몰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는 단편 ‘무너지다 만 사람’에도 나온다.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일이었으며 다시 재현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는 잠실의 추억은 모텔 일변도인 요즘 소설 속 사랑의 장소와 대비되어 오히려 참신한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는 표제작에 해당하는 단편 ‘노 파사란’에서 파업 농성 중에 만난 남녀 노동자가 농성장 밖 “철조망이 쳐진 벽돌담 아래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역시 참신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집 &lt;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gt;를 낸 소설가 손홍규.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소설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를 낸 소설가 손홍규.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두 번째 작품 ‘옛사랑’은 화자 ‘나’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버지는 낯선 동네의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거두었고, 슈퍼에서 멀지 않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을 속절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찾아간 낯선 동네가 아버지의 옛사랑 박춘자씨와 관련 있는 곳이었음은 나중에 드러나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 만난 어머니와 박춘자씨가 서로 손을 쓰다듬으며 주고받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갔어요. 아주 갔어요./ 가셨군요. 정말 가셨군요./ 나만 두고 갔어요./ 이녁만 두고 가셨구려.”

‘눈동자 노동자’ 역시 농촌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주인공들은 농사가 아니라 도로공사를 위한 유물 발굴 현장에서 발굴 보조 업무에 종사한다.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작가의 아버지가 실제로 했던 일이라고 했다. 주인공 ‘그’를 비롯해 대부분이 육칠십대 남자들인 데 비해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스물다섯 살 젊은이 윤호의 존재가 이채롭다. 같이 일하던 김씨 형님이 비탈에서 굴러떨어진 바위에 다리를 다쳐 입원한 데 이어, 구덩이를 판 흙이 무너지면서 윤호가 그에 매몰되어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윤호의 죽음에 그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현장의 안전을 보장할 책임도 없었다. 그는 일당 사만오천원짜리 인부일 뿐이었다. (…) 그는 윤호를 죽이지 않았지만 윤호를 구원하지도 않았다. 스물다섯 살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그가 아니었지만 스물다섯 살 젊은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죽지도 않고 살아온 건 그였다. 이게 죄인지 아닌지 대답해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중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에 이와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병원 비정규직 조리 노동자로 농성 투쟁을 벌이던 아내가 농성장에 찾아온 남편을 보며 곱씹는 생각이다. “이 사람은 결코 모를 거야. 우리 아들에게 절망을 준 자들이 바로 자기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 우리 아들을 깊은 슬픔에 빠뜨린 자들이 바로 자기 같은 자들이라는 걸 이 사람은 결코 모를 거야. 그렇게 맞고 굴복하고 순종하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고 믿는 사람이니까. 자기도 그렇게 견뎌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농촌을 배경으로 삼아 지나간 사랑을 반추하거나 노인들의 한과 슬픔을 풀어 내는 소설들 속에 전쟁기의 이념 갈등과 박종철 고문사, 산업 재해,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 문제 같은 사회적 현안들이 자연스레 끼어드는 것 역시 손홍규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실제로 하수관 매립 공사를 하다가 흙더미에 매몰되어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일과 아버지의 경험을 섞어서 쓴 작품이 ‘눈동자 노동자’”라며 “이 작품을 포함해 내 소설들에 나오는 사회적 문제들은 일부러 포함시켰다기보다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쓴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소설집 &lt;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gt;를 낸 소설가 손홍규.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소설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를 낸 소설가 손홍규.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