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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패자다

등록 2020-11-06 04:59수정 2020-11-06 09:41

중산층 해체하고 엘리트 착취하는 능력주의 비판
교육·노동 개혁하는 ‘민주적 평등의 정치학’이 대안

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세종서적·2만2000원

‘공정’은 오늘날 가장 막강한 화두다. 차별과 격차의 실체는 불분명해도 ‘불공정하다’는 한마디 외침은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최근 몇년간 ‘공정’을 열쇳말로 한 담론은 인류사회 곳곳을 떠돌고 있다. 미국 예일대 법대 교수인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 책은 지난해 미국에서 ‘능력주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능력주의’는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풍자소설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 소개한 용어로, 능력(실력)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능력에 따른 차별을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가 곧 함정이라는 마코비츠의 주장은 중요해보인다. 능력조차 불평등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파하고 있다 해도, 능력 위주 사회의 지배자이자 수혜자인 엘리트조차 또다른 파멸로 향하고 있다는 마코비츠의 통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의 ‘3부 새로운 귀족과 나머지의 사회’는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대통령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각각 42대, 43대 미국 대통령인 이들은 1946년 여름 50일 차이로 태어나 나이도 같다. 다만 유복자 클린턴은 외조부모 손에 자란 중산층이었고, 부시는 상류층이었다. 마코비츠는, 이 둘의 계층이 달랐지만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점에 주목한다. “클린턴과 부시 모두 미국 역사상 유례없이 경제적으로 통합된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났”기에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마코비츠는 지적한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마코비츠는 빅토리아 시대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말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부유층과 나머지 계층이 두 개의 나라를 구성한다. 그들은 서로 접촉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다른 지역이나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습관, 생각, 감정에 무지하다. 서로 다른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하며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예법을 따르고 같은 법률을 지키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능력주의의 함정’이다. 귀족적 특혜나 계급적 차별을 철폐하는 명분으로 힘을 얻어온 ‘능력’은 마치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듯하지만, 더 공고한 계급의 대물림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트들은 앞선 시대의 귀족과 달리 동산과 부동산을 상속하기보다 인적 자본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 즉 자녀에게 교육을 통해 능력을 배양하는 방식으로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미국에서도 엘리트 부유층을 중심으로 초호화 사교육이 호황이다.

교육과 더불어 직업 역시 부와 특권의 집중과 세습을 위한 도구다. 극단적인 경쟁을 거쳐 승리한 고학력 엘리트들은 초고소득을 보장받는 금융·의료·법조·정보기술(IT) 업계에 종사한다. 마코비츠는 이 분야를 ‘엘리트끼리 야망을 겨루는 격전지’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은 백전필패다. 막대한 부 없이는 불가능한 교육의 기회가 이들에게 주어질 리 없는데, 사교육은 물론 공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가정의 어린이조차 엘리트 대학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출생이나 그 이전 자궁에서부터 계획적이고 숙련된 투자를 막대한 규모로 꾸준하게 받아온 부유층 어린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교육 기회에서 밀려난 중산층은 일자리에서도 쫓겨난다. 고학력과 기술, 경영기법을 치열한 경쟁 속에 장착한 소수 엘리트들이 수천명의 노동력을 대신하고 중산층은 장래성 없는 직장으로 밀려난다. 다수 중산층의 몫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가면서, 중산층에게 남는 것은 상처와 고통뿐이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능력주의 사회는 엘리트들 역시 피폐하게 만든다. 오늘날 엘리트들은 과거 귀족과 달리 임대수익이나 금융수익 등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막대한 소득을 얻는다. 최고 수준의 집중 교육을 받고 치열한 경쟁을 거친 만큼 엘리트들이 일해 얻는 소득은 천문학적이다. 그만큼 엄청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생 동안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늘 긴장하고 지친 상태다. 마코비츠는 엘리트 밀레니얼 세대가 ‘집단 불안’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은 어떤 상황일까? 마코비츠는 특히 능력주의 교육 시스템을 설명하며 한국을 사례로 든다. “한국에서는 개인과외가 가계 지출 총액의 12%를 차지하고 백만장자인 과외학원 강사들이 전국적으로 유명인사”라고 적었다. 다만 한국은 마코비츠가 짚는 미국보다 더욱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엘리트 교육과 좋은 일자리의 독점이라는 능력주의의 문제와 함께 이 나라엔 귀족과 다름없는 재벌체제 역시 상존한다. 능력주의가 한때 귀족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전략이었다면, 한국은 여전히 귀족이 존재하는 가운데 능력주의의 폐해까지 겹쳐 있는 형국이다.

마코비츠는 능력주의 함정에서 벗어날 대안도 제시했다. 교육과 노동 분야의 개혁이다. 중산층에게도 다양한 교육기회가 열리도록 해야 하며, 중산층 노동을 촉진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 두가지 방안의 핵심은 정부가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궁극적이자 근본적 대안으로 ‘민주적인 평등의 새로운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코비츠는 이 책 말미에 “오래된 구호를 새롭게 인용”한다. “이제 중산층 근로자와 상위 근로자를 포괄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에게 잃을 것은 쇠사슬 이외에 없고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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