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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 악물고 희망을

등록 2020-11-06 05:00수정 2020-11-06 09:49

해피랜드
김해자 지음/아시아·9500원

김해자의 시집 <해피랜드>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시인 자신의 투병 체험이 짙게 배어 있다. 지난해 연명치료를 거절한다는 사전 의향서를 써 두고 위험한 수술을 받았던 시인이 입원 기간과 퇴원 뒤 몸을 추스르면서 쓴 시들이 책에 묶였다.

“이 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톱니에 뼈가 갈리는 소리도 같았다/ 부딪치며 바퀴가 삐거덕거리며 굉음을 내기도 했다// 자기공명 기계 MRI,/ 뚜껑까지 닫힌 관 속에서 세계가 내지르는/ 모든 소리들이 차례차례 재생되는 듯했다”(‘자기공명’ 부분)

정밀검사를 위해 들어간 기계가 시인에게는 관으로 인식된다. 완벽하게 폐쇄된 그 안에서 시인은 세계가 내는 온갖 소리 또는 비명을 듣는다. 자석의 작용과 성질을 뜻하는 ‘자기’를 ‘자기’(自己)로 새겨 들으며 “세계가 아픈 건 나 때문 아닌가”(‘시인노트’) 자책한다. 체온을 재고 병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던 시인은 “지구의 체온을 생각했다”. “열대우림이 태워지”고 “캘리포니아가 불타고 호주가 불타”며 “나무와 풀이 불타고 코알라가 불타고 (…) 죄 없는 캥거루가 몸부림치”(‘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코로나 4’)는 현실이 그를 더 아프게 한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수술과 입원 치료를 위해 한 달여 비워 두었던 시골 집에 돌아오자 아랫집 아주머니가 포옹으로 반겨 맞는다. “괜찮을 거라고/ 아파서 먼 길 다녀온 걸 어찌 아시고 걱정 마라고,/ 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갔다고 얼까 봐/ 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이웃들’). 그 이웃들은 서른 번의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너덜너덜해져 돌아온 시인을 제 식솔처럼 거두어 먹인다.

“아침 식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랫집 어매가 국솥을 들고 서 있었다/ (…) / 옆집 언니가 무장지와 오이지 파래고추장구이와/ 내 몫으로 담가놨다는 김치통들을 밀개차로 싣고 왔다”(‘인류, Human Being’ 부분)

동남아시아에서 쓰레기를 주워 연명하는 아이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짓고(‘해피랜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과 하청 노동자의 사고사(‘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에 절망하다가도 “우리는 이 악물고 희망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나무 아래로-김종철 선생님을 추모하며’)라던 김종철 선생의 호소를 되새기며 시인은 마음을 다잡는다.

시인은 지난 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코로나 사태와 저 자신의 병을 동시에 겪으면서 쓴 시들이라 독자를 고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이중의 아픔 속에서 나온 시들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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