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평생 독립운동 연구 박민영 박사
박민영 박사는 ‘한일 강제 병합’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병합이란 말에는 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가 있어요. 앞에 강제가 있어도 그 본질적 의미에는 변함이 없죠. 병합 대신 국치나 병탄이라고 써야죠.” 강성만 선임기자
박민영 박사가 최근 펴낸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과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 평전>, <한말 의병의 구국성전> 표지.
작년말 독립운동사연구소 정년퇴임
독립운동가 이상설·이상룡 평전 내 “인류보편 가치 추구한 독립운동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산
80년대보다 독립운동사 대접 못 받아” 그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독립운동사가 위대한 학문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를 추적해 보면 한 분 한 분이 다 위대해요. 그분들의 사상과 행동이 하나같이 위대합니다. 일본과 싸워 이기고 지는 것만이 독립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이죠. 백암 박은식 선생은 독립운동이 우리 5천년 역사의 정수라고 했어요. 우리 민족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일제에 맞서 들고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한 침탈에 굴복하지 않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저항하는 게 독립운동인데 이는 우리 민족의 저력 때문에 가능했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수치심과 책임감입니다. 이게 있으면 친일할 수가 없었죠. 이런 독립운동사의 긍정성과 효용적 가치가 갈수록 몰각되고 있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의 가장 큰 특성으로 ‘인류 보편적인 가치 추구’를 꼽았다. “안중근은 인류 평화의 전 단계로 동양 평화를 말하면서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두 가치에 똑같이 무게 중심을 뒀어요. 백범도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독립된 우리나라가 문화국가가 되길 원했어요. 이웃 나라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했죠.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 대부분에 적용됩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산이죠.” 그가 초기엔 유생 중심이었고 1907년 이후 후기엔 군인과 관료, 포수 등 다양한 신분이 참여한 의병 전쟁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병들은 너무나 정의로운 가치에 바탕을 둬 싸웠어요. 한국 민족과 세계 인류가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꿈꿨어요. 인류 보편적 가치이죠.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가 1907년에 의병을 만나고 친일파에서 지한파로 변신합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달리 의병들의 이상과 포부가 담대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하지만 그가 보기에 우리 땅에서도 독립운동은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젠 대학에서 독립운동사를 배울 환경도 안 되고 가르칠 사람도 없어요. 독립운동사에 합당한 역사관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학자가 있어야 하는 데 별로 없어요. 사회적 인식이나 공부 환경 측면에서 제가 독립운동 공부를 시작한 80년대보다 못해요. 제대로 된 나라라면 독립운동을 가르치는 학과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독립운동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 자산입니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으로 정착한다면 대한민국도 많이 바뀔 겁니다.” 그가 평생 공부한 의병을 두고는 이런 말을 했다. “역사 전공자 중에서도 의병전쟁이 아니라 의병운동이라고 쓰는 분들이 있어요. 의병을 왜소하게 평가하는 걸 보면 무척 속이 상합니다. 의병전쟁 20년을 포괄해보면 우리 국민과 일본 사이의 선전포고 없는 총력전이었어요. 그때 일본도 의병 탄압하는 상보를 전투일지라고 불렀어요. 1940년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때 의병전쟁에서 죽은 조선인 숫자가 50만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었죠. 의병은 독립운동의 시작이고 그 뒤로 독립운동이 흔들림 없이 장기지속할 수 있는 바탕이었죠.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은 굵은 선으로 연결됩니다.” 연구가 절실한 독립운동사 분야를 묻자 그는 “독립운동사 전체가 다 비어 있다”고 했다. “해방 이후 배출된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많지 않아요. 각 분야를 조금씩 개척한 상태죠.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사 전체 자료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임시정부 등 분야별로만 자료집이 일부 있어요. 국가 역량을 동원해 수백 권이 되는 전체 자료집을 만들면 그 과정에서 연구인력이나 연구역량도 키울 수 있겠죠.” 그는 애초 대학원에서 성리학을 전공할 계획이었단다. “윤병석 선생님이 유학자인 유인석 의병장 연구를 권하는 바람에 의병이 제 평생 연구 주제가 되었죠. 어릴 때 산 고향 함양군 유림면에는 상투에 갓 쓴 분들이 많았어요. 조선 사회와 비슷했죠. 어릴 때 환경이 저의 삶에 영향을 미쳤죠.” ‘마음 속에 가장 크게 자리한 독립운동가’는 누구인지 궁금했다. “특정해 말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안중근일 수도 있고 이상설, 이동휘일 수도 있죠. 굳이 말하자면 저한테 표상이 되는 인물은 면암 최익현(1833~1907)입니다. 면암은 명분과 의리를 가장 존숭했던 화서 이항로 문하에서 공부한 정통 선비이죠.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자신과 일체화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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