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독립혁명가 도산 안창호 평전>(지식산업사).
한국근대사 전문가인 신용하 서울대 명예 교수의 62번째 저술인 이 책은 저자의 첫 평전이기도 하다. 논문을 모아 김구와 신채호, 박은식 선생에 관해 각각 저술했지만 평전은 아니었단다.
2015년 집필을 시작했다는 이 책에서 저자는 도산(1878~1938)을 ‘민족독립혁명가’로 규정했다. “독립운동 지도자 중 가장 잘못 알려진 분 중 하나가 도산입니다. 도산이 만든 흥사단 단원이었던 춘원 이광수나 송아 주요한 선생이 유려한 문체로 쓴 도산 평전에서 도산을 ‘개량주의적 민족개조론자’로 그렸기 때문이죠.” 8일 전화로 만난 저자의 말이다. 올해 설립 108년인 흥사단이 홈페이지에서 공식 소개하고 있는 도산 전기 넷 중에서도 두 권이 춘원과 송아의 저술이다.
춘원은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대표로 있던 1921년에 도산의 만류에도 자신을 찾아온 애인 허영숙을 따라 서울로 떠나버렸다. 독립운동 진영 이탈에 일경 체포까지 면해 ‘민족 배신자’ 소리를 듣던 이광수는 1년 뒤에 논문 ‘민족개조론’을 <개벽>에 발표하면서 글의 내용이 도산의 것임을 암시했다.
“우리 민족성이 좀 열악해 일본 식민지가 됐기에 먼저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게 춘원의 민족개조론입니다. 이는 자치론으로 연결됩니다. 도산도 민족개조란 말을 썼지만 완전히 달라요. 도산은 오히려 우리 민족이 우수하다고 했어요. 다만 일본이 잘못 판단하고 우리 힘이 부족해 식민지가 됐으니 온 민족이 혁명적으로 힘을 길러 민족의 완전 독립을 달성하자고 했죠. 도산은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편성하자는 이야기도 했어요. 민족독립혁명론이죠.”
신 교수는 “도산이 1921년에 춘원을 흥사단에서 출단시키지 않고 무기정권 처분만 한 게 한국민족이 도산을 오해하게 하였다”고도 했다. “춘원은 귀국해 수양동우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도산과 흥사단의 이념을 끌어와 자신의 변절과 민족개조론을 합리화했어요.”
그는 도산이 1907년에 만든 국권회복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가 3년 뒤 간부회의에서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한 이래 도산이 독립전쟁 준비를 중시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도산은 1920년 1월 3일 임시정부 신년경축사 연설을 하면서 ‘6대 사업 및 방략’을 제시하는데 그 첫 번째가 군사입니다. 임정이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것도 도산이 주도했죠. 도산은 1926년에 국내에서 자치론이 조직적으로 대두할 때도 자치론 절대 반대를 외치며 민족혁명론을 주창합니다.”
그는 “1927년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탄생 이후로는 좌·우파 모두 도산을 지지했다”고도 했다. “도산은 1926년에 좌·우를 다 포함한 민족유일독립당 결성을 제안합니다. 1년 뒤 신간회가 태어난 것도 이 여파이죠. 하지만 신간회는 이광수를 참여시켜주지도 않았어요.”
신 교수가 도산 평전을 쓰겠다고 생각한 게 1977년이니, 44년 전이다. “그해 200자 원고자 700매로 신민회에 대해 장문의 논문을 썼어요. 그때 도산이 개량주의자가 아니라 혁명가라는 걸 알았죠. 도산이 만든 신민회는 군주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하자고 했어요. 임정이 이를 받아 민주공화정을 채택했죠. 신민회는 ‘시민혁명당’이었어요.”
그가 첫 평전 인물로 도산을 택한 데는 서재필(1864~1951) 선생의 평가가 큰 영향을 미쳤단다. “제가 2000년에 나온 도산 안창호 전집 편찬에 참여했을 때 서재필 선생의 ‘도산 평’을 봤어요. ‘독립운동가 중에서 도산이 제일 뛰어난 분이다. 도산이 미국 대통령이 됐으면 링컨보다 더 큰 일을 했을 것’이라고 했더군요. 이 글을 보고 도산 평전을 써서 우리 동포들이 배울 수 있는 모범적 스승으로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독립운동가로서 도산의 출중함이 뭐냐고 하자 신 교수는 역시 서재필 선생의 평이라며 말을 이었다. “서 박사는 도산의 두뇌가 명석하고 늘 미리 공부한다고 했죠. 문제를 정확히 포착하고 그다음에 문제 해결 방안도 적절하게 제시하고 지도까지 하는 게 도산의 특성이라고 했어요. 한국 독립운동가 중에는 권위주의적 독재형도 있었지만 도산은 민주주의적 봉사형이었어요.”
신 교수는 도산의 참모습이 감춰진 데는 일제 말 친일로 돌아선 이광수와 주요한의 책임이 크다고 봤다. “이광수와 주요한은 1921년 이전에 도산이 독립운동한 것만 보고 책에 담았어요. 그 뒤에 독립운동한 것은 몰랐어요. 이 부분을 제가 책에 자세히 썼어요. 둘은 도산의 절반 모습만 담았고 그것도 일부 왜곡했어요. 도산은 여러 자료에서 흥사단이 민족독립혁명단체임을 누누이 강조했어요.”
신 교수는 춘원이 1921년 귀국해 만든 수양동우회(1926년 결성)나 동우회(1929년 개칭)를 ‘흥사단 국내 지부’로 보는 흥사단 쪽 견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수양동우회나 동우회는 흥사단 국내 지부가 아니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토론이 더 필요해요. 한말에 신민회를 조직해 활동한 비밀결사 전문가인 도산이 변절해 일제 고등경찰의 마수를 달고 다니는 이광수에게 민족혁명사업단체인 흥사단 국내 지부를 맡길 이유가 없어요. 당시 중국에 자리한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잘 훈련된 한인 청년단원들이 많아 국내 사업을 하려면 그들을 밀파했겠죠.”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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