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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종교 이후 메시아는 과학?

등록 2006-01-26 19:37수정 2006-02-06 15:33

러셀은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죄와 벌이라는 낡고 험악한 교리 대신에 과학이 뒷받침 된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사랑에 의해 고취되고 과학으로 인도되는 삶을 훌륭하다고 제안했는데, 과학에 대한 그의 맹신은 또하나의 광신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림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명화들 가운데 하나로, 후기인상주의의 대가 폴 고갱(1848~1903)의 작품 <황색의 그리스도>(1889).
러셀은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죄와 벌이라는 낡고 험악한 교리 대신에 과학이 뒷받침 된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사랑에 의해 고취되고 과학으로 인도되는 삶을 훌륭하다고 제안했는데, 과학에 대한 그의 맹신은 또하나의 광신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림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명화들 가운데 하나로, 후기인상주의의 대가 폴 고갱(1848~1903)의 작품 <황색의 그리스도>(1889).
기독교는 인류 불행의 근원
성욕 죄악시 모두 히스테리 환자 만들고
지식 탐구는 진리에 대한 도전 여겨 발전 봉쇄
죄와 벌 험학한 윤리 대신 과학적 윤리 주장
러셀의 믿음 또 하나의 광신으로
고전 다시읽기/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종교를 비난하는 일은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다. 사회의 주된 통념으로 굳어진 신앙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교리 자체는 유익하고 훌륭하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인들의 모습은…” 하는 식의 문장은 종교를 비평하는 글의 보편 문법이다시피 하다.

그러나 버트란드 러셀의 종교 비판에는 우회로가 없다. 논리와 과학으로 중무장한 노련한 철학자는 종교에 대해 곧바로 칼을 겨눈다. 그에게 종교는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근원’이며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인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괴물’일 뿐이다. 20세기 지성을 대표하는 러셀은 왜 이토록 종교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을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이러한 물음에 답을 주는 책이다.

“종교는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해롭다.”

러셀은 이 책 머리말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바라는 세계는 집단적 적대감에서 해방된 세계, 만인의 행복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에서 나올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세계다.”

유일신 사상 갈등·대립 불러

하지만 종교는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장애만 될 뿐이다. 합리적인 지식은 반박과 토론을 통해 여물어 간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반론도 논쟁도 무의미하다. 신심 깊은 사람들은 아무리 결정적인 반증을 제시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 신앙에 대한 ‘똥고집’은 오히려 깊은 믿음의 증거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세상에는 유일신을 내세우는 숱한 종교들이 있다. 그네들 교리대로라면, 수많은 종교 중 하나만 참이고 나머지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항상 갈등과 대립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는 잔인함과 폭력이 넘쳐나던 때였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라는 서양 중세에는 신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온갖 박해가 행해지지 않았는가? 심지어 1차 세계대전조차도 그 기원은 완전히 기독교적이었다. 세 사람의 황제는 모두 신심 깊은 기독교인들이었으며 당시 영국의 내각 또한 그랬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기독교가 (타락의) 탈출구를 마련해 주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전혀 없다.” 러셀은 관용과 용서는 오히려 교회에 반대하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성경이 신의 분노를 사는 행위들로 금지하고 있는 항목들은 흔히 일상의 유용함과 거리가 멀기 일쑤다. 예컨대, 염소 새끼 가죽을 어미젖에 넣어 삶는 것이 왜 불경한가? 하필 일요일이 안식일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즈텍인들은 인육을 먹지 않으면 햇빛이 희미해질 것이란 두려움에 식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일상의 실용과 맞닿지 않은 종교의 의무들은 아즈텍 인들의 비장함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성도덕 집착 가치판단 왜곡

러셀은 특히 성도덕의 측면에서 기독교에 강한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처녀 교사들을 예로 든다. 처녀 교사들에게는 정절 의무가 무척이나 중시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볼 때, 과연 성적 욕구를 억눌러야 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본능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보다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성적 욕구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성적 욕구를 죄악으로 만들어 버리고 정상적인 분출을 좌절시켜 버린다. 그 결과 기독교 도덕은 사람들을 모두 욕망에 억눌린 히스테리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성도덕에 대한 집착은 가치 판단을 왜곡시키곤 한다. 만약 일생을 열병 퇴치에 애를 쓰다가 몇 명의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람과, 평생을 무능한 생활로 가족들을 고생시켰지만 성적으로는 결백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기독교의 잣대에서 볼 때 누가 더 도덕적인 사람으로 평가 받겠는가? 러셀은 말한다. “성직자들은 해가 되지 않는 행위는 비난하고, 커다란 해가 되는 행위는 눈감아 준다.”

기독교는 정상적인 도덕 발전마저 가로막아 버린다. 종교 창시자의 말은 신앙인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잠재우는 과정에서 신의 뜻에 대한 유일한 권위자가 등장하곤 한다. 해석은 ‘예전에 공표된 진리’를 현재 사건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도덕윤리는 항상 과거에 얽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지식과 탐구는 흔히 진리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며, 도덕은 사회발전을 옥좨는 족쇄로 전락해 버린다. 따라서 러셀은 결론을 내린다. “종교는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해롭다.”

“과학이란 이름의 새로운 종교, 해법은?”

그렇다면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대안으로 러셀이 내세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죄와 벌이라는 낡고 험악한 교리 대신에 과학이 뒷받침 된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러셀이 생각하는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취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여기서 지식이란 과학을 말한다. 과거 사제들은 페스트에 걸린 마을을 치유한답시고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모아놓는 예배는 질병이 더 빨리 퍼져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제대로 된 지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과학은 올바른 행동을 일러줄 수 있는 최선의 잣대다. 사람들은 이제 죄악을 ‘악마의 작용이 아니라 정상적이지 않은 호르몬 분비와 현명치 못한 여건 탓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모든 악에 원인이 되는 빈곤과 생존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줄 터다. 심지어 그는 과학은 인간의 본능까지도 바꾸어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과학은 우리 자손들에게 지혜와 자제력, 충돌이 아닌 조화를 좇는 성격을 갖추게 해 줄 것이다.”

과학이란 이름의 새로운 종교

하지만 안타깝게도 러셀의 확신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광신처럼 들릴 뿐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쓰여졌다.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은 과학탐구밖에 없다고 믿던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가 팽배했던 시기다. 하지만 21세기 초엽을 살고 있는 우리는, 러셀보다 더 깊은 안목에서 사상의 성패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과학은 그의 확신과는 달리 인류를 그다지 확실하게 구원하지 못했다. 과학기술은 인류를 빈곤에서 해방시키는 만큼이나 더 큰 욕망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인류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욕구로 고통받고 있다. 그뿐 아니다. 환경, 배가되는 전쟁의 공포 등, 과학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제들은 종교적 광신만큼이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과학은 러셀의 생각처럼 종교의 대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하나의 종교였을 뿐이다. 과학은 효율과 합리성의 이름 아래 다양한 가치의 잣대들을 잠재워 버린다. 나아가, 과학으로 무장한 광포한 자본주의는 세계의 문명을 자본의 기준으로 획일화 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세상은 온전하게 설 수 없다. 사실, 러셀이 비판했던 광신적 기독교의 세계는 과학이 빚어낸 광신적 자본의 세계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함께 구원하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종교분쟁이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폭발음을 내고 있는 21세기 초엽, 러셀의 이 작은 책은 새로운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서평자 추천 도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트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펴냄(2005)

(부드러운 우리말 번역과 들고 다니기에 좋은 제본)

러셀 자서전 상·하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펴냄(2003)

(러셀의 삶과 철학을 개관할 수 있음)

철학이란 무엇인가

러셀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2001)

(러셀이 직접 쓴, 읽기 쉬우면서도 자신의 견해가 담뿍 담긴 철학개론서)

50자 서평

◇ 반데그라프(인터넷서점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나는 러셀의 논리가 비기독교인에게 지지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 문제가 논리로 증명되는 단순한 문제라면 종교 갈등과 분쟁은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오빠핫도그(〃) “(크리스천인) 나는 러셀이 종교에 대해 제기한 진실성의 문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유용성의 문제, 즉 ‘종교는 문명에 무엇을 공헌하였는가’의 문제는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 레인메이커(〃) “기독교인이라면 내용의 불온함, 불건전성(!)으로 인해 몸서리 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여러번 되풀이해 읽어볼 만한 책이다. …(러셀의) 주장에 반박하기 어려운 것은 러셀의 글이 워낙 탄탄한 철옹성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데카메론>, <소피스테스>, <호밀밭의 파수꾼>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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