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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약한 여자’들의 처세술

등록 2006-01-26 19:54수정 2006-02-06 15:34

안현미 시집 <곰곰>
안현미 시집 <곰곰>
2001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한 안현미(34)씨가 첫 시집 <곰곰>(랜덤하우스중앙)을 묶어 냈다.

여기 여자가 있다. 아니, “여자가 되겠다고”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곰곰>)는 곰/여자가 있다.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여자가 된 곰은 행복했던가? 시집 <곰곰>은 여자가 된 곰의 운명에 관해 ‘곰곰’ 궁리해 본다.

안현미 시의 여자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몽유병>의 여자를 들 수 있겠다. “잘못태어났어” 중얼거리며 “흐느껴 우는 병 속의 여자” 말이다. 여자는 왜 흐느껴 우는가. 같은 시의 “어느 날 성난 사내가 안에서 지른 빗장으로/그 여자 영영 돌아가버리고…”라는 구절을 참조해 보자. 시 <몽유병>만이 아니라 시집 속의 여러 작품들에는 남자에게 버림받거나 학대 당하는 여자들이 속출한다. “사내는 돌아오지 않”(<빗살무늬토기>)고, 남겨진 여자는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음악처럼, 비처럼>) 속절없이 되뇐다.

버림받은 여자는 비굴해진다. 비굴은 그 여자의 일상이 되고 일용할 양식이 된다.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비굴 레시피>)

비굴의 끝은 다시 비굴이라는 얘기다. 끔찍한 악순환.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악순환이 <비굴 레시피>라는 시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집 속의 다른 시들에서 ‘여자’는 끝까지 비굴하지는 않다. 사랑과 이별, 실연과 아픔에는 끝이 있다. 실연의 아픔 속에서 한동안 하릴없이 허덕이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시간이 온다. “마음을 도려낸 칼을 씻고 그렇게 그냥 세검정처럼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마침표>)이.

그런 다음, ‘복수’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내의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여자가 펼치는 복수의 드라마를 보라.

“여자는 눈, 코, 입이 다 사라진 사내의 그림자 속에서 사과를 베어먹듯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말하자, 고 중얼거리며 사내의 눈, 코, 입을 다 베어먹고 마침내는 그림자까지 알뜰하게 다 베어먹고 유쾌하게 사과의 검은 씨를 뱉듯 사내를 뱉는다”(<개기월식>)


자신의 존재를 가리는 위협적인 그림자 사내를 한 톨 사과 씨를 뱉듯 유쾌하게 내뱉는 여자의 초상. 통쾌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극적인 반전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빨간 장미 서른세 송이를 들고 내 5c여자가 오늘 나를 찾아왔어요”(<고장난 심장>)

대문자 ‘여자’의 방문에 그 비밀이 있는 것 아닐까. “나 삼류야 양아치야 독 많은 옻나무야/뒷산 올빼미야 (넌) 아주 작은 형용사야”라 건들거리며 뻐기는 사내를 향해 “(그래) 나 아주 작은 형용사야”(<아주 작은 형용사야>) 일단 수긍하는 척하며, 그런 불리한 처지를 역전의 계기로 삼는 여성(주의)적 인식의 발동 말이다. ‘곰’을 겹쳐 씀으로써 새롭고 전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표제작의 태도는 이런 경로를 거쳐 나온 것이다.

안현미씨의 시가 여성적 경험과 인식을 중심으로 짜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집에는 충분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안현미 시의 ‘여성적’ 사유가 생물학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맥락까지 포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장난 심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로 갔나요? 그 여름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서 끝내 시간을 놓아버린 내 엄마는요? 어디까지가 바닥인가요? 왜 생은 고장 투성이인가요? 당신, 생은 다 그런 거라고 눙치지 말아요 시시해요 시까지 시시해요”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안현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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