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이음·1만8000원
과학기술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인 브뤼노 라투르의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독해하려면,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을 비롯해 라투르의 기존 연구를 이해하는 게 좋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프랑스의 라투르와 미셸 칼롱과 함께 영국의 존 로 등이 1980년대에 발전시켰다. 단순히 살펴보면, 이 이론은 과학·기술을 연결망 구축의 산물로 보는데 과학자와 기술자 등 인간뿐 아니라 실험기기, 텍스트, 건물, 생물 등 다양한 비인간 역시 행위자로서 연결망에 참여한다고 보는 것이, 즉 인간과 비인간을 행위자로서 구분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자 특징이다. 예컨대 과학자와 실험기기가 네트워크를 이뤄 지식이 만들어지고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생을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1990년대 일반 사회이론으로 확장되고 인류학, 문화연구, 지리학, 환경학, 정치학, 경제학 등으로 확대 적용된다.
라투르는 1991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2009)를 펴내, 인간(문화)과 비인간(자연)의 이분법은 부적절하다고 설파한다. 실제로는 연결망 구축을 통해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hybrid)가 만들어져왔음에도 인간과 비인간이 다른 범주에 속하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져왔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이분법 구도를 라투르는 ‘근대주의 헌법(constitu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으로 근대주의 헌법이 온전하게 작동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선언하는 데 이른 것이다. 라투르의 이론은 1999년 출간한 <판도라의 희망>(휴머니스트·2018)과 <자연의 정치>(국내 미번역)로 본격화한다. <판도라의 희망>에서는 근대주의 헌법의 이분법이 만들어진 연원을 궁구하며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어떤 질적 간극도 존재하지 않음을 밝혀냄으로써 근대주의 헌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연의 정치>에서는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근대주의 헌법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철학으로서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근대주의 헌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설 실천적 논의를 전개한 것이다.
2017년 출간되고 이번에 한국에서 번역된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라투르의 이런 지적 여정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주요 열쇳말 중 하나는 부제에 담긴 ‘신기후체제’(New Climatic Regime)이다. 여기서 라투르는 기후변화라는 인류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뿐 아니라 이미 심화된 불평등과 대규모 규제완화, 인류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세계화로 인한 각종 위기 등이 몰려 닥친 오늘날을 ‘신기후체제’라고 규정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영국에서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통과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이미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이뤘음에도, 트럼프가 해치워버린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는 ‘기후변화 부정’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트럼프주의로 대표되는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는 지정학적 이슈이고 불평등 문제와도 연결된다. 1980년대 이래로 탈규제와 복지국가의 해체가 본격화하고, 2000년대 이후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흐름이 나타난 데 이어, 지금까지 극대화한 불평등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최근 50여년 간의 정치 지형을, 로컬과 글로벌이라는 양극을 구도로 설명한다. 근대성을 배경으로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 벌여온 다양한 투쟁을 살피며, 여기에 ‘대지’와 ‘외계’라는 새로운 극을 등장시킴으로써 글로벌과 로컬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대지는 환경이나 배경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 영토 자체가 인류에 맞선다는 아이디어는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물론이고 코로나19 팬데믹과도 맞닿는다. 여기에서 기후위기에 생태학과 환경운동이 제대로 맞서지 못한 원인을 짚는데, 대지를 엄밀히 정의하지 못함으로써 19세기 이후 사회 투쟁에서 발생한 동력을 생태 투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분석한다.
이 대지의 개념은 신기후체제를 극복하고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라투르가 고안한 정치적 기획의 핵심이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초월적 존재로 보는 근대적 인식론은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의 원인인 반면, 대지에 속한 생명체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관점은 신기후체제에 맞설 매우 중요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투르는 “우리는 땅에 속해 있고, 대지의 것들 중의 대지의 것들이다”라고 강조하며 “자연에서 대지로 관심을 바꾸면 기후 위협 이후 정치적 입장을 얼어붙게 하고 사회 투쟁과 생태 투쟁 사이의 연대를 위태롭게 했던 단절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때 인간과 비인간들로 공동 구성된 ‘대지의 것들’ 간의 관계는 의존성을 주요 원칙으로 삼는다. 인간은 분산된 역할 중 하나를 맡을 뿐이며 (기후)변화의 원인은 메커니즘이 아닌 발생(genesis)을 분석함으로써 찾게 된다. 이를 라투르는 기존의 생산 시스템(system of prodution)과 다른 생성 시스템(system of engendering)으로 구분하는데, “생산 시스템에서 생성 시스템으로 전환함으로써, 불의에 맞서 저항할 주체를 증식하고 이로써 대지를 위한 투쟁에 나설 잠재적 우군의 폭을 상당히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인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비인간인 바이러스는 행위자로서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 마스크와 진단 키트 역시 비인간 행위자로서 인간과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바이러스-마스크-진단 키트’의 긴밀한 연결성에서 기후변화와 관련한 대지의 것들 간의 연결망을 알아차릴 수 있다. 라투르는 지난해 팬데믹이 시작할 즈음, 코로나19에 따른 고통과 혼돈은 더 큰 기후위기를 준비하기 위한 예행연습(드레스 리허설)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팬데믹은 신기후체제의 정치를 더욱 활성화하지 않을까? 그는 이 책 끝에서 다급한 투로 우리에게 요청한다. “당신은 어디에 착륙하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 장소를 공유하며 살아가기로 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영토를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 세계’에서 분리하고, 지구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낼 생각이 없다. 공룡부터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를 짓밟고 앉아서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라 데쿠베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