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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잔향

등록 2021-02-19 04:59수정 2021-02-19 10:09

[책&생각] 책거리

이브 앙리 도나 마티유-생-로랑. 1936년 8월1일 알제리에서 태어나 2008년 6월1일 파리에서 숨진, 1966년 처음으로 여성 바지 정장을 도입하고 사파리 재킷을 고안한, 불세출의 디자이너. 그에게는 50년을 함께한 연인이 있었습니다. 피에르 베르제. 1930년 11월14일 출생해 2017년 9월8일 세상을 떠난, 사업가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 동성간 결합을 보장하는 법 제정 운동에 적극 나섰고 2010년 경영난에 빠진 일간지 <르 몽드>를 인수해 경영하며 편집권 독립을 명문화한, 언론역사에 남을 인물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베르제의 작은 책이 출간됐습니다. 묘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책입니다.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김유진 옮김, 프란츠)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원제는 , ‘이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파리의 아침은 얼마나 맑고 싱그러웠는지…”로 시작하는 첫 글은 2008년 6월5일 생로랑의 장례식 추도사입니다. 78살의 노인이 쓴 이별의 언어는 ‘맑고 싱그럽게’ 느껴집니다. 베르제는 연인을 떠나 보내고 6개월 뒤부터 편지를 써내려 갑니다. 50년을 함께해온 삶을 되돌아보며 정리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편지이지만 결별의 편지는 아니야. (…) 50년 동안 너는 나를 매혹적인 모험으로 데려갔지. (…) 오늘,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생의 한 장이 끝났음을 너의 죽음이 알려준 거야. (…) 나는 나의 모든 추억과 함께 홀로 남았지. 어둠이 내리고, 먼 곳에서 음악이 들려와. 그러나 그곳에 갈 힘이 없네.” 2009년 8월14일 마지막 편지, 마지막 대목. 쓸쓸한 듯하지만 받아들이는 자세는 어딘가 높은 데 가닿아 있는 것처럼, 잔향이 오래 남습니다.

김진철 책지성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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