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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문학이라는 인생 사용 설명서

등록 2021-02-19 05:00수정 2021-02-19 08:30

어슐러 르 귄, 토니 모리슨 문학 에세이 나란히 번역 출간
여성으로서 공통점 위에 장르·흑인작가로서 문제의식 보여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황금가지·1만6800원

보이지 않는 잉크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바다출판사·1만8500원

미국 문학의 두 거장 어슐러 르 귄(1929~2018)과 토니 모리슨(1931~2019)의 문학 에세이가 나란히 번역 출간되었다. 르 귄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원제 Words Are My Matter)와 모리슨의 <보이지 않는 잉크>(원제 The Source of Self-Regard)가 그것으로, 미국에서 각각 2016년과 2019년에 출간된 신작이다.

르 귄은 <어스시의 마법사>를 비롯한 ‘어스시 연대기’와 <빼앗긴 자들>을 필두로 한 ‘헤인 우주 시리즈’로 유명한 판타지 및 에스에프(SF) 작가다. 휴고 상과 네뷸러 상, 로커스 상 등 유서 깊은 상을 다수 수상했고 미국 에스에프 판타지 작가 협회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전미 도서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모리슨은 <빌러비드> <솔로몬의 노래> <재즈> 등의 소설로 흑인의 삶과 투쟁을 그린 작가로, 1993년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두 작가의 에세이는 강연 원고가 상당수 포함되었다는 공통점과 함께 여성 작가로서 절감한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역시 공유한다. 르 귄의 글들에서 ‘문학 소설’ 또는 리얼리즘 소설에 대한 장르소설 작가의 견제와 항변이 읽힌다면, 모리슨의 책에서는 ‘백인 남성 문학’이라는 미국 문학의 낡은 정전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져 보인다.

어슐러 K. 르 귄. 황금가지 제공
어슐러 K. 르 귄. 황금가지 제공

“문학 소설을 장르소설과 대립시킬 때의 문제점은, 소설 종류의 합리적인 차이를 말하는 척하면서 비합리적인 가치 판단을 숨긴다는 겁니다. 문학이 우월하고, 장르가 열등하다고 말이죠. 이건 편견에 불과해요.”

이 편견을 깨기 위해 르 귄은 자칭 ‘르 귄의 가설’을 제시한다.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모든 소설은 문학에 속한다”는 것이 그것. 르 귄은 상상력을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 상찬하는데, 그 상상력을 가장 오래도록 그리고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한 장르가 판타지다. “판타지의 재료는 리얼리즘이 다루는 사회 관습보다 훨씬 영구적이고 보편적”이며, 더 나아가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적이고 다언어적이며 무한히 연결된 사회를 그리려면 판타지의 세계적이고 직관적인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이 르 귄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르 귄이 문학 소설을 무턱대고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그는 버지니아 울프 소설 <올랜도>의 독자에게 16세기 런던의 겨울 템스 강을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하는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자세한 묘사”, 그리고 같은 작가의 소설 <플러시>에서 개의 마음속이라는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으로 들어가는 시도로부터 에스에프 쓰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노라고 밝힌다. 그는 또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마거릿 올리펀트, 메리 할록 푸트처럼 ‘실종’됨으로써 문학 정전에서 배제된 여성 작가들의 사례를 드는가 하면, 조지 엘리엇과 콜린 매컬로에 관해 언급하면서 외모에 관한 품평을 곁들이는 풍조를 겨냥해 “예쁜 얼굴이 아니라는 죄악은 죽은 후까지 여자들을 따라간다”고 개탄한다.

르 귄이 처음 판타지와 에스에프를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장르는 거의 남자들 판”이었고, “여성 등장인물들은 주로 여기저기 나오는 공주, 자주색 외계인의 촉수에 잡혀 비명을 지르는 예쁜 여자” 등이었다. 그러나 모리슨이 1989년에 행한 강연에 따르자면 “젠더가 없는 태평성대를 향한 꿈은 여성 동성애자들만 꾸는 것이 아니고, 이는 점점 늘고 있는 여성 에스에프 작가들이 말해주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여성 에스에프 작가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배경을 이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토니 모리슨. 바다출판사 제공
토니 모리슨. 바다출판사 제공

“여성 해방은 흑인 해방이 갈아놓은 흙 위에서 가장 훌륭히 꽃을 피웠다. 19세기 중반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서프러제트 즉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낳았다. 20세기 중반의 흑인 인권 운동은 여성 해방 운동을 낳았다.”

여성이며 흑인 작가인 토니 모리슨이 보기에 미국의 여성 해방 (운동)은 흑인 해방 (운동)이 닦아 놓은 토대의 덕을 보았다. 인종 문제와 성차별 사이에서 모리슨의 방점은 인종 문제 쪽에 찍혀 있는 듯하다. “남성 우월주의 내의 인종주의적 요소가 성차별보다 부차적인 듯 가장하는 것은, 다시 말해 성차별을 완전히 없앨 기회를 회피하는 것이다. (…) 인종과 계층의 탄압에 가담하는 행위는 여성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자기 파괴적 행위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주인공인 백인 소년 허클베리의 성장에 ‘깜둥이’ 짐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통찰은 미국 문학사 전체에 대한 비유로 확대된다. “허클베리가 짐 없이 도덕적 인간으로 성숙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흑인은 이름난 그 어떤 (백인) 미국 작가보다 먼저 미국에 거주했으며, 이 나라의 문학에 아마도 가장 은밀하고 급진적이고 파장이 큰 힘을 가한 세력일 것”이라고 모리슨은 파악한다. “문학 담론에서 인종 없음을 강조하는 행위 자체가 인종적인 행위”라는 그의 언명은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라는 오웰의 일갈을 떠오르게 한다.

백인 여성 작가인 르 귄의 책에서 인종 문제에 관한 언급을 찾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2014년 전미 도서상 평생 공로상 수락 연설에서 르 귄은 자신이 “너무도 오랫동안 문학에서 배제되었던” “판타지와 에스에프, 상상문학 작가들”을 대표해 상을 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고는 타깃을 바꾸어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의 힘은 벗어날 수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치면 왕들의 절대 권력도 그랬지요. 인간이 만들어 낸 권력이라면 인간이 저항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저항과 변화는 예술에서 시작될 때가 많고, 그중에서도 우리의 예술, 말의 예술일 때가 많아요.” 르 귄은 문학이야말로 ‘삶’이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데 가장 유용한 사용 설명서라고 강조하는데, 두 문학 거장의 에세이는 그들이 온몸으로 써서 후대에 전해준 인생 사용 설명서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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