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사계절·1만5000원
재일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71) 전 도쿄대 교수. 사계절 제공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는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학자 강상중(71)의 저작이다. 강상중은 와세다대학을 다니던 1972년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한 뒤 일본 이름을 버리고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돌아와 재일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됐다. 이후 일본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펴낸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열망하는 일본 속 한국인으로서,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복구할 방안을 궁구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활동하는 학자로서 일본 사회를 향해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 개선이 왜 필요한지 이해시킴과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지식인으로서 한국 정부를 향해 한반도 평화 진전을 바란다면 한-일 관계 악화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지은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70여 년 동안 유지된 ‘분단체제’가 그 ‘종말의 시작 단계’에 들어섰다는 진단과 함께 이 책을 시작한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세 번이나 연거푸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최초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그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들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교착 국면이 길어지고 있지만, 넓은 시야에서 보면 분단체제 해체의 과정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 지은이의 믿음이다. 그러나 한-일 관계로만 좁혀서 보면, 두 나라는 갈등의 연속 끝에 ‘전후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극심한 불신과 반목을 겪고 있다. 지은이는 분단체제 해체와 한-일 관계 악화라는 두 흐름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시하지 못할 구조적 관련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은 두 흐름 사이에 그런 관련이 맺어지게 된 지정학적 배경을 살피면서 한-일 양국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 호혜의 관계를 회복할 길을 찾는다.
지은이는 논의를 펴나가기에 앞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최근 역사를 꼼꼼히 되짚는다. 지은이가 역사적 검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북한은 왜 핵 개발에 매달리게 됐나’라는 물음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까지 북-미 교섭의 역사를 살펴보면, 북한이 원한 것은 ‘핵무기 보유’ 자체가 아니라 ‘체제 안전 보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은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고 국교를 수립하는 것이다. 북한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기대를 걸고 정상회담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였다.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북-미 협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향해 매진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미국에서 강경 보수파로 정권이 뒤바뀐 시기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북-미 관계는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노무현 정부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애써 쌓은 남북관계의 공든 탑을 무너뜨렸다.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가 다시 전진의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특히 2018년 이후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에 한-일 관계는 최악을 향해 내달렸다. 물론 두 나라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였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차가운 관계는 계속됐지만, 한-일 관계가 전례 없는 대결의 수렁에 빠진 것이 2018년 이후인 것은 사실이다. 이해에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치된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됐고,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한-일 관계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것은 2019년 여름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국’(수출 절차 우대국)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고 한국 정부도 여기에 맞서 보복 조처를 내린 일이었다. 지은이는 양국 관계가 이렇게 되기까지 문재인 정부가 사태 악화를 막으려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외교적 실수라고 지적한다.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북-미 협상을 촉진하려면 한반도를 둘러싼 이웃나라를 협력자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 지점에서 미숙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일본을 방문해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하고, 일본을 한반도 문제의 우군으로 삼았던 것을 잊지 말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아베 총리는 남북이 가까워지고 협력하는 분위기가 커지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런 흐름을 훼방 놓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일본을 다독여 한반도 평화가 일본에 득이 된다는 점을 설득해야 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지일’이 필요하다”고 단호히 말한다.
나아가 지은이는 일본 정부에도 시대의 흐름을 지혜롭게 읽을 것을 권고한다. ‘한반도의 반영구적 분단’을 전제로 한 ‘현상유지 정책’에 매달려서는 동북아시아 평화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은이는 2019년 여름 남-북-미 세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직후에 일본이 ‘화이트국 배제’를 결정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반도의 급속한 평화 진전을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화이트국 배제라는 난데없는 보복의 칼을 들이민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다. 이런 조급한 대응이 자해적 결과를 빚고 말았음은 이후의 시간이 보여주었다. 지은이는 일본 정부가 한국 내부의 ‘남남갈등’을 이용하고 보수파를 지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보수파 박근혜-이명박 정부 시절에 한-일 관계가 뒤집혔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두 나라가 ‘전후 최고의 관계’에 이르렀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남북의 화해와 통일로 한반도가 중국과 가까워지고 휴전선이 대한해협으로 내려오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지만, 그런 걱정이야말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는 안보로 묶이고 중국과는 경제로 묶여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지은이는 지금 일본 정부에 필요한 것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미가 관계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동북아시아 평화의 토대가 되며 일본의 평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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