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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적 딜레마 사이

등록 2021-03-05 04:59수정 2021-03-05 19:04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자음과모음·1만3800원

<다른 세계에서도>는 의사이자 작가인 이현석의 첫 소설집이다. 2017년 등단작 ‘참’(站)과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표제작 등 여덟 단편이 묶였다. 그 절반인 네 작품이 의사를 주인공이나 화자로 삼았고 ‘너를 따라가면’에는 간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작가 자신의 전문성을 적극 살린 셈인데, 의료 세계의 묘사가 드문 한국 소설로서는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이 가운데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는 아예 소설을 쓰는 의사를 등장시킨다. 의사 소설가인 ‘나’가 담당하는 환자 이시진 씨는 식물인간 상태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10년 넘는 세월을 그와 함께한 동성 연인은 아무런 관계도 인정받지 못한 채 접근마저 차단당한다. 레즈비언인, ‘나’의 대학 동기 수연이 그 일을 각색해 에스엔에스에 올리자 국회에서 생활동반자법 발의 논의가 나올 정도로 큰 반향이 일지만, ‘나’는 수연 글의 과장과 왜곡을 지적하며 “그런 글을 쓰기 전에 최소한 동의는 구했어야 하는 거”라 항의한다.

“넌 물어봤니?”라는 게 ‘나’의 항의에 대한 수연의 반격이다. 과거 수연이 어렵사리 털어놓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나’가 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소설에 써먹은 사실을 겨냥한 말이다. ‘나’는 이시진 씨와 그의 동성 연인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있노라고 이시진 씨 딸에게 털어놓는데, 이 장면은 그가 수연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암시로도 읽힌다. 작가 김봉곤이 지인의 문자 메시지를 허락 없이 소설에 차용해서 논란이 되기 전인 201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해당 사태를 비롯한 글쓰기의 윤리를 다루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현석 소설가&nbsp;
이현석 소설가 

낙태에 찬성하는 비혼 여성 의사 ‘나’와 임신한 그의 여동생 해수를 등장시켜 낙태를 둘러싼 윤리적 딜레마를 다룬 표제작,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죄수의 죽음이 단순 병사인지 형무소 당국의 고의 방치에 의한 죽음인지를 조사하는 의사의 이야기인 ‘참’ 등에서 보듯 이현석은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적 딜레마가 부딪치는 미묘한 지점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광주 5·18 당시 성매매 여성들의 헌혈을 둘러싼 소동을 그린 ‘너를 따라가면’, 김용균 사망사고를 소재로 한 ‘눈빛이 없어’, 탈북 의사가 나오는데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8년에 이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예견한(?) ‘부태복’ 등 다른 수록작들 역시 묵직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의사 시인은 드물지 않아도 의사 소설가는 희소한 상황에서, 의업과 소설 쓰기를 겸하는 신인 작가의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자음과모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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