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출렁거리는 죽음들 속 환한 숨결

등록 2021-03-19 04:59수정 2021-03-19 09:42

환한 숨

조해진 지음/문학과지성사·1만4000원

조해진(사진)의 네 번째 소설집 <환한 숨>에는 죽음의 이미지들이 출렁거린다. 소설집 맨 앞에 수록된 단편 ‘환한 나무 꼭대기’의 첫 문장 “혜원이 죽었다”는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조해진의 소설들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환한 나무 꼭대기’에서 혜원의 친구이자 간병인으로 그를 임종한 ‘그녀’는 “눈이 펑펑 내리는 외진 버스 정류장에서 완전히 눈에 파묻힌 채 잠이 들듯 임종을 맞는 장면”을 자신의 최후로 상상한다. 이어지는 작품 ‘흩어지는 구름’에서는 화자 ‘나’가 “설원을 걸으며 조금씩 흐릿해지고 엷어지다가 마침내 구름 속에서 기화되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이미지화한다. ‘눈 속의 사람’은 한때 구술사 작업을 같이 했던 여진이 구술 당사자였던 “최길남 님의 장례식에 함께 가자”며 화자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각각 산업재해와 수은중독에 희생된 청소년들의 이야기인 ‘하나의 숨’과 ‘파종하는 밤’, 신문사의 파업 인력을 대체하느라 채용된 신입 기자의 내적인 갈등을 그린 ‘경계선 사이로’, 제자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 당한 뒤 실종을 택한 교수를 등장시킨 ‘높고 느린 용서’ 등은 말하자면 사회적이며 상징적인 죽음을 다룬 작품들이라 할 법하다.

‘하나의 숨’에서 고교 실습생 신분으로 공장에서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하나의 담임인 기간제 교사는 “하나의 숨이 내가 들이켜는 숨과 섞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두려웠다”며 “하나 대신 일하고 돈 벌며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비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는 하나의 숨이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것일 텐데, 그 죽음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자신의 숨과 섞인다는 생각은 두렵고 비참하지만 동시에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죽음을 죽은 자들만의 일로 치부하고 외면하는 대신, 살아 있는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그에 동참한다는 뜻이겠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에 해당하는 작품이 따로 없는데, ‘하나의 숨’에서 죽음과 삶이 서로를 감싸 안는 광경은 어쩐지 ‘환한 숨’이라는 책 제목을 떠오르게 한다.

그게 아니라면, 파업으로 사직한 선배와 대체 인력 후배의 대면을 묘사한 ‘경계선 사이로’ 결말부의 한 대목은 어떨까.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투 선 채 연진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윤희의 섬세하게 주름진 얼굴”로 각인된 장면 말이다. 소설집 <환한 숨>이 물리적 죽음과 사회적·상징적 죽음의 이미지들로 출렁거림에도 미약하나마 긍정과 낙관의 전망을 놓치지 않는 것은 이런 환한 숨들 덕분일 것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