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도정일 지음/문학동네·1만5500원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사무사책방·1만8800원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도정일 지음/사무사책방·1만9800원
보이지 않는 가위손
도정일 지음/사무사책방·2만2800원
영문학자 도정일 전 경희대 교수는 ‘실천적 인문학자’라는 지칭이 어울리는 이다. 그는 2001년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을 설립해 어린이 전용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을 전국 곳곳에 세우고 학교 도서관들과 지역 도서관들을 지원했으며 영유아를 위한 독서 프로그램 ‘북스타트’ 운동을 이끌었다. 대학에서 퇴임한 뒤인 2011년에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대학장을 맡아 대학 교양교육의 혁신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1994년 화제의 첫 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냈던 그가 그 뒤로는 문학평론 대신 독서 운동과 교양교육 운동에 전념하는 한편, 논문이 아닌 신문·잡지 칼럼에 주력한 것 역시 문학비평의 좁은 틀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향한 더 넓은 차원의 관심과 실천을 이어 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회적 활동에 못지 않게 꾸준히 글을 썼음에도 그 글들을 책으로 묶어 내는 데에는 무심했던 그가 최근 저서 네 권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문학 에세이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와 인문 에세이 <만인의 인문학: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행복서사의 붕괴> <보이지 않는 가위손: 공포의 서사, 선망의 서사>가 그것들로, 가깝게는 2010년대 중후반에서 멀게는 1990년대 초반에 발표했던 것들을 갈무리한 것이다. 어느덧 만으로 팔순을 넘긴 이 노 학자가 한창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발언했던 지난 시절의 기록이자 증언으로서 소중한 문집들이다.
출판사들은 편의상 문학 에세이와 인문 에세이로 책의 성격을 구분했지만, 문학과 인문학이 별개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네 권의 책은 무람없이 넘나들고 포개진다.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 서영인과 대담에서 도정일은 자신에게 문학평론과 사회운동이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데, 그에게는 인문학적 통찰이나 사회적 발언 역시 문학 및 평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거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문학 에세이와 인문 에세이 네 권을 한꺼번에 내놓은 실천적 인문학자 도정일 전 경희대 교수.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나가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시학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고, <만인의 인문학> 머리말에 썼다. 사진은 2016년 3월 첫 비평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개정판을 내고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던 당시의 모습이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도정일 사유 체계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열쇳말이 ‘이야기’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야기의 우주” 속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물, “이야기하는 원숭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특정의 이야기 혹은 이야기들로 짜여진 세계 속으로 초대되는 일이다.” “이야기는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희망이 없는 세계에 희망을, 정의 없는 세계에 정의를 집어넣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대표한다.” 이야기가 의미와 희망과 정의를 환기시키고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 ‘연결’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하늘과 땅을 잇고 인간과 신을, 인간과 인간을,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자들을 연결”한다. ‘존재의 확장’이다. 이야기의 그런 연결 기능은 타자의 위치에 자신을 놓아 보는 공감 능력을 함양시키고, 그 때문에 이야기는 “공존과 상생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문학이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가치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지니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야기와 문학이 삶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라면, 삶 역시 문학적 접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학은 문학에 대한 담론이지만, 삶이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구조로 짜여지고 진행되는 한 그 삶은 동시에 시학의 대상이다.” ‘삶의 인문학’이다. 도정일이 영화와 그래픽 노블 같은 서사 장르는 물론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 남북 정상회담 같은 비문학적 사건 역시 서사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가위손> 말미에 실린 여건종 숙명여대 교수와 대담에서 도정일은 첫 비평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 실린 글들을 쓰던 당시 자신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밝힌다. “작품을 이야기하되 문예비평적 관심영역에만 묶이지 말고, 현대인의 삶의 문제에 연결지어 문학이 현실적인 어떤 적절성 같은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러지 않으면 비평이라는 형식의 글쓰기가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운명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다른 책들에서 그는 한국 문학의 고질 가운데 하나로 ‘문제 구성력의 빈곤’을 든다. 한국인들이 겪은 역사적 경험과 고통의 크기와 깊이에 비해 그것을 표현한 문학 생산물이 빈약하다는 것인데, “문제를 의미 있게 구성하는 힘,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질문’을 작품의 배경에 까는” 능력의 부족을 그는 그 까닭으로 꼽는다. 그가 첫 비평집 이후 현장 비평에 거리를 두고 삶의 시학, 삶의 인문학 쪽으로 나아간 데에는 한국 문학에 대한 이런 판단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하는 언급이다.
2016년 3월 경기 분당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던 때의 도정일 교수.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1997년 외환위기와 구제금융 이후 대학 사회에까지 밀어닥친 시장 원리에 대한 비판에도 그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시장 원리는 그가 소중히 여기는 인문적 가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에 해당한다. ‘시장전체주의’라는 표현은 시장의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가리켜 도정일이 만들어 쓴 말이다. “시장전체주의는 한 사회의 공적 가치와 규범들을 모든 방위에서 포위·질식시켜 시장 효율과 시장조작 이외의 다른 가능성들을 열어놓으려는 어떤 도덕적 고려의 문맥도 살아남기 어렵게 하고, 사회 유지에 필요한 공공의 제도 및 정책을 옹호할 이성적 담론들을 마비시”킨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 시장전체주의를 견제할 수단으로서 그는 인문학의 가치를 특히 강조하는데, 후마니타스 칼리지라는 인문·교양교육 프로그램을 주도한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
네 권 책에 묶인 글들은 비록 묵은 것이지만, 책의 서문들은 새로 쓴 것들이다.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의 서문 한 대목은 이러하다.
“문학은 당대에 뿌리를 두고서 당대가 넘으려다 넘지 못한 불완전성, 뚫고자 했으나 다 뚫지 못한 한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와 소통하면서 당대를 넘어선다. 한계는 그저 한계가 아니라 다음 시대의 잠재성으로 남는다. 문학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곳에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